창립선언문

‘백기완’이란 이름은 한국 근현대 역사에서 ‘저항’의 상징이다. 탁월한 민중사상가이자 사회혁명가였던 그의 한살매는 숨가쁘게 내달려 온 격동의 한국현대사 자체였다.

선생은 1950년대는 달동네에서 야학을 하며 도시빈민운동에 나섰고, 전쟁으로 폐허가 된 산하에 1백만 그루의 나무를 심는 녹화운동을 하며 농촌계몽운동에 앞장섰다. 1960년 4․19혁명 이후부터는 함석헌, 계훈제, 장준하 선생 등과 함께 재야 운동의 선봉이 되었다. 1964년 굴욕적인 한일협정반대운동, 1969년 삼선개헌 반대운동, 1971년 유신헌법 반대를 위한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운동, 1976년 3․1 구국선언, 1979년 ‘YWCA 위장결혼식 사건’으로 불리는 전두환 군부쿠데타 저지 운동, 1985년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설립을 주도하고, 1987년 6․10항쟁 이후 두 차례에 걸쳐 노동자민중 대통령후보로 나서는 등 주요한 현대사의 굴곡마다 그는 천둥처럼 깨어있는 시대의 목소리였다. 폭포처럼 불의와 폭압을 향해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내리꽂히는 온몸의 실천이었다. 그로 인하여 그는 지난 군부독재시대 가장 많은 가택연금을 당하고 투옥되고 고문당해야 했지만, 2021년 2월 15일에 쓰러지는 그날까지 한국의 왜곡된 근현대를 온몸으로 깨부수고 평화, 평등의 진정한 새 시대로 나아가고자 하는 바랄(꿈)을 버리지 않았다.

혁명가 ‘백기완 선생’은 당대 최고의 이야기꾼이자 시인이었고, 민족․민중 미학의 뿌리이기도 했다. 선생은 민중의 원한과 분노, 바랄(꿈)을 씨줄과 날줄로 엮어 ‘장산곶매, 이심이, 버선발, 뿔로살이, 쇠뿔이, 새뚝이, 달동네, 새내기, 비나리 …’등 기발하고 창의적인 이야기를 끊임없이 토해내었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현 한국작가회의), 민요연구회, 민중문화운동연합, 민족미술협의회, 민족문화대학설립위원회 등 수많은 문화예술 운동의 산파를 맡았다. 이제는 한국사회를 넘어 전 세계 피압박 민중의 노래가 된 <님을 위한 행진곡>의 작자로 “혁명이 늪에 빠지면, 예술이 앞장서자”라며 고비마다 문화혁명을 설파하였다.

한국사회 대표적인 통일운동가였던 ‘백기완 선생’의 꿈은 두 발로 분단선을 넘어 북녘 땅을 밟고 그리운 어머니의 묘소에 참배하고 큰누이를 만나는 일이었다. 그의 작은형은 국군으로 전사해 국립묘지에 묻혔고, 이산가족이었던 큰형은 전쟁 후 삼팔선을 넘어와 긴 세월 형무소에 갇혀야 했다. 피눈물의 가족사를 넘어 <백범사상연구소>, <통일문제연구소> 등을 설립하고, 평생 한반도의 평화통일 운동에 앞장섰던 그가 꿈꾸는 진정한 통일은 민중주도 해방통일이었다. 모든 제국주의와 권력자들의 폭압과 폭력을 넘어 “사람의 자유, 목숨의 자유, 자연의 자유. 이런 자유를 온 사회, 온 지구적으로 누리는” 일이었다.

‘백기완 선생’의 매일은 노동자 민중의 고통에 공감하고 연대하는 발걸음이었다. 선생은 언제 어디서나 올곧게 노동자 민중의 편에서 사고하고 어떤 상황에서든 그들이 해방되는 세상을 앞당기고자 한걸음을 떼었다. 선생은 평생 인간과 생명을 돈과 이윤의 노예로 삼고자 하는 자본주의를 해체하고 모든 인간과 생명이 평등한 공동체, 곧 너도 일하고 나도 일하고 너도 잘 살고 나도 잘 살되, 올바로 잘 사는 노나메기 세상(벗나래)를 세우자는 바랄을 실천하고자 올곧고 가열차게 투쟁하였다. 그리고는 이제 그 꿈을 꾸는 이들의 반석이 되었다.

본 재단은 “내 평생의 뜻을 후세대들이 잘 이어받아 주기를 바란다”는 선생의 유지를 받들고자 한다. 한 사람의 열 걸음이 아니라 열 사람의 한 걸음으로 백기완 선생의 삶과 문화예술, 민중사상과 투쟁, 노나메기를 향한 지극한 바랄(희망)을 기억하고 계승하고 실천하려는 젊은 버선발 니나(민중)들이 널리 뜻을 모아 설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