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살매(생애)

1. 혁명가 백기완

2017년, 광화문 광장 ⓒ채원희
혁명가 백기완은 불평등과 소외를 심화하고 사람을 돈의 노예로 만들어 서로 경쟁과 이기심을 조장하는 자본주의 체제를 해체하고 너도 나도 일하며 함께 올바로 잘사는 노나메기 벗나래(세상)를 건설하는 데 한살매를 바쳤다. 늘 노동자 민중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독재정권과 독점자본과 맞서서 언제나 맨 앞에 서서 투쟁하였다. 군사독재정권에서 2020년에 이르기까지 한국 근현대 역사에서 ‘백기완’은 곧 ‘저항’의 상징이다. 죽음에 이르는 고문을 당하고 수시로 투옥이 되어도, 선생은 조금도 망설이거나 흔들리지 않은 채 새로운 세상을 향하여 담대하게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다.

2. 민중 사상가 백기완

2017년, 연구소 집필실 ⓒ채원희
사상가 백기완은 마르크스를 비롯한 진보적 사상가의 영향을 받기는 하였지만, 어머니에서 노숙자에 이르기까지 무지렁이들의 말과 이야기에 담긴 민중들의 분노와 한과 신명이 어우러진 사상을 바탕으로 삼아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부정하며 노동자 민중이 해방된 세상을 여는 길을 민중들의 언어로 구성하였다. 현대사의 굴곡마다 천둥처럼 깨어있는 시대의 목소리를 내질렀고 불의와 폭력에 대해서는 폭포처럼 사자후를 내리꽂았다. 그는 민중 혁명 사상을 머리가 아닌 온몸으로 써내려갔다.

3. 통일운동가 백기완

2000년, 예순여덟 살. 615남북정상 회담 뒤 북쪽 조선노동당 창건 55주년 기념식에 초청받아 방문한 평양 대동강변에서 눈물에 젖은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통일운동가 백기완은 두 발로 분단선을 넘어 북녘 땅을 밟고 그리운 어머니의 묘소에 큰절하며 큰누이를 만나기를 간절히 소망하였다. 가족사를 넘어 온 겨레와 함께 분단모순을 극복하고 통일의 세상을 열고자 <백범사상연구소>와 <통일문제연구소>를 설립하고, 한반도의 해방통일 운동에 앞장섰다. 모든 제국과 권력자들의 압제와 폭력을 넘어 모든 민족 민중이 자유로운 통일을 향하여 온몸을 던졌다.

4. 예술가 백기완

2015년, 여든세 살. 대학로 학전소극장에서 열린 민중사상 특강 ⓒ정택용
민족미학자이자 예술가 백기완은 “혁명이 늪에 빠지면, 예술이 앞장서자”라며 예술을 통해 혁명을 돌파하고자 했다. 민중들의 말과 이야기와 몸짓에서 참다운 아름다움과 민중사상의 뿌리를 찾아 민중미학으로 체계화하였다. 민중들의 한과 분노, 바랄(꿈)을 씨줄과 날줄로 엮어 ‘장산곶매, 버선발, 꼴굿떼, 이심이, 뿔로살이, 새뚝이, 달동네, 새내기, 비나리 …’등 진정성과 구체성이 넘치는 수많은 이야기를 끊임없이 토해내었으며, <님을 위한 행진곡>의 원래 가사인 <묏비나리>를 지었다.

5. 울보 백기완

인간 백기완은 타협하지 않고 단호하면서도 눈물이 많고 환하게 웃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1933년 황해도 은율 구월산 밑에서 태어나 1945년 해방 뒤 남쪽으로 내려와 한평생 어머니와 누이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을 품고 살았다. 평생 자본과 권력, 불의와는 터럭만큼도 타협하지 않았고 이런 기미가 조금이라도 보이는 이들에게는 불호령을 내렸다. 그러면서도 노동자와 서민, 니나, 무지렁이들에게는 늘 따끔한 한 모금이었으며, 그들의 아픔을 보듬으며 같이 울어주는 울보였다. 젊게, 밝게, 굵게 언제나 한마음으로 새로운 벗나래(세상)를 향한 그리 강렬한 투쟁도 실은 선생의 지극한 공감에서 비롯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