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난의 발자취
1967년 설립 당시는 ‘통일’이란 말의 ‘통’ 자도 못 쓰게 하던 으스스한 세월이었기에 출발은 ‘백범사상연구소’로 문을 열었지만, 그조차도 독재정권의 탄압으로 제대로 간판을 달 수 없어 백 선생님은 간판을 등에다 메고 다니셨다는 말씀까지 하셨다. 그래서 장준하 선생님은 백 선생님의 이름 대신 ‘백 통일’, ‘백 소장’으로 불렀다고 하셨다.
1973년 유신헌법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운동을 전개했으며, 12월 26일 흥사단 건물 강당에서 ‘항일 민족문학의 밤’을 열어 서명운동을 공개적으로 시작했다. 이 행사에는 시인 신경림, 문학평론가 백낙청 등 문인들이 많이 모여서 항일문학을 무기로 친일 박정희 유신체제를 공략하며 해방투쟁(정치투쟁)과 문화투쟁을 변증법적으로 하나로 하는 해방통일 운동의 새로운 길을 열기도 했다.
이날 행사에서 선생님이 유신헌법을 공략하는 일장 연설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전깃불이 나갔다. 그 순간 가만히 기죽어 있을 선생이 아니셨다. 강당을 가득 메웠던 청중들을 향해 “여러분, 손가락은 다들 갖고 있지요? 손가락이 있는 사람들은 손가락을 들고 그래도 썽이 안 차는 사람은 염통(심장)이라도 꺼내 염통에 불을 지르자구요. 그리하여 그 불길을 들고 청와대까지 진군합시다”고 외치셨다.
이내 장내는 화산처럼 분노의 열기가 터져 나왔다. 그러자 불을 껐던 박정희 일당들은 다시 전깃불을 넣어줬고 그리하여 대회는 감격과 환호 속에 치러졌지만, 행사를 마치고 선생님은 창작과비평사 사장 김윤수 교수와 함께 집으로 가다가 밤 11시 반쯤 집 근처에서 폭력을 당하기도 했다.
바로 그해 말쯤 박정희는 유신헌법 개정 요구에 대해서는 용서할 수 없다고 공갈 성명을 냈다. 이어 1974년 1월 8일 대통령 긴급조치 1호를 발동해 장준하 선생과 백기완 선생을 감옥에 넣었다. 그리고는 헌병들이 총을 메고 서 있는 비공개 군사재판에서 15년형이 구형되고, 그 다음 날 12년형이 확정되었다. 그리고는 통상적인 감옥 생활이 아닌 유폐 생활을 견뎌내야만 했다.
이 만행에 분노한 국내외 여론에 못 이겨서 백기완 선생은 석방되고, 그 뒤부터 끊임없이 줄기찬 유신 분단독재 타도운동을 벌이며 통일운동을 힘차게 밀고 나갔다. 그 과정에서 수없이 체포 구금되고, 그럴 적마다 모진 매질을 견뎌야만 했다.
1979년 박정희가 자기 부하한테 죽고 나자 유신 잔당들은 백기완 선생을 다시 구속했고, 이어서 명동 YWCA 위장결혼사건의 주모자로 선생님을 다시 체포한 뒤 서빙고 보안사 지하 고문실에서 살인적인 고문을 가했다. 그때 보안사령관이 전두환이었다.
1984년 드디어 ‘백범사상연구소’의 간판을 떼고 ‘통일문제연구소’로 제 이름을 찾았으나, 사무실이 없으니 백 선생의 집 대문에 종이 간판을 걸었다. 전두환의 하수인들은 그날로 그 종이를 떼서 불을 질렀다. 그다음 날 다시 간판을 달자 이번엔 중앙정보부에서 나와서 체포하겠다고 협박 공갈을 했다. 그렇지만 그다음 날 다시 종이 간판을 달았고, 저들은 다시 또 불을 지르면서 ‘통일’이라는 ‘통’ 자는 절대로 안 된다며 탄압을 했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그야말로 등에다가 등짐으로 통일문제연구소 간판을 달고서 전두환 군사독재와 맞섰다.
1985년 해방통일의 정서를 담은 《해방의 노래 통일의 노래》라는 시집을 발간해 모든 해방통일 운동의 횃불로 삼고자 했다.
1986년 부천경찰서 권인숙 성고문 사건을 폭로, 주도했다는 혐의로 체포령이 내려져 6개월 동안 수배되었다가 잡혀, 꽁꽁 묶인 채 서울로 압송돼 또다시 감옥에 갇혔다. 전두환 일당에게 당한 고문 후유증이 도져서 다시금 옥사 직전에 내몰린 끝에, 간신히 병감정 유치로 한양대병원으로 옮겨졌다.
1987년 7월 9일, 이한열 열사 장례식에서 ‘썽풀이’ 장례를 처음으로 선보였다. 썽풀이란 죽었던 원한을 다시 불러일으키는 우리네 장례법이다. 시민대표로 나선 백 선생님은 조사에서 죽은 한열이를 보고 일어나라 일어나라고 외치며, “통일이란 전두환 군사독재와 미 제국주의로부터 죽음을 강요받고 있는 민중의 일어남이라는 것”을 역설하셨다. 이어서 춤꾼 이애주 교수가 이한열 열사 유해를 모시고 연세대에서 시청앞까지 썽풀이 행진을 하는 장면은 그야말로 해방통일 운동의 예술적 승화라고 하셨다.
그러나 통일문제연구소는 1998년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잠시 문을 닫기도 했다. “전화기 3대가 6개월간 단 한 번도 울린 적이 없다.” 우리 손으로 뽑는 민간인 대통령 시대가 왔다지만, 주변은 떠나가고 선생님은 허허벌판에 외롭게 남았다. 그 외로움 속에서 선생님은 다시 통일문제연구소를 일으키고자 연구소 대문에 ‘한 발자욱만 더’라는 시를 써서 붙이며 용기를 내셨다. 그리곤 책을 써서 “책 만 권 예매운동”을 벌였고, 마침내 만 권을 팔아 다시 연구소의 문을 열며 이런 말씀을 남기셨다.
“통일문제연구소는 앞으로도 그 모든 억압과 불의를 타도, 해체하는 일에 앞장을 설 것이다. 정말로 너도 일하고 나도 일하고 그리하여 너도 잘 살고 나도 잘 살되, 올바로 잘 사는 노나메기 벗나래(세상)를 만드는 것이 통일의 알짜(실체)라고 굳게 믿으면서, 니나(민중)의 해방투쟁의 역사와 함께 나아갈 것임을 밝혀둔다. 통일문제연구소 간판도 못 달게 하고 통일이라는 통 자도 못 쓰게 하던 피눈물 나는 역사를 살아오면서도 지금까지 꿋꿋이 연구소를 지켜왔다. 아니,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런 피눈물 나는 역정을 겪어오면서 통일이란 미 제국주의의 억압과 침략으로부터의 해방이요, 그 해방은 분단 억압체제로부터 집중적인 피해를 받고 있는 니나의 해방이라는 것을 분명히 해두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