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백기완의 지성은 어디서 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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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2026. 8. 24. 18:51
백기완 선생과의 조우…삶에서 벼려낸 ‘지성’을 찾아서
[길을 찾아서 - 물리학자 장회익 경계를 넘어]
7화_ 백기완의 지성은 어디서 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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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고 백기완 선생(1932~2021)과 나는 같은 시대, 같은 땅에서 살아왔다. 하지만 나는 과학의 언저리를 맴돌고, 백 선생은 반독재·통일 운동가로서 삶의 현장을 누볐기에, 내가 그의 강연을 여러차례 듣기는 했으나 막상 그와 대면해 이야기를 나눌 기회는 거의 없었다. 단 한번, 2005년 무렵이라 생각되는데, 충남 아산에 있는 순천향대학교에서 그와 내가 함께 강연을 하게 되었다. 이날 나는 우리 민족이 처한 현실에 대한 그의 투철한 분석, 특히 미국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강연이 끝난 뒤 그와 나는 몇마디 차담을 나누었다. 실제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 지금은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단지 나는 그의 지성이 어디서 온 것인지 꼭 물어보고 싶었으나, 차마 이 말을 꺼내지는 못했다.
왜 하필 백 선생의 지성을 들먹이는가, 선생이야말로 감성의 사나이, 의지의 사나이, 불꽃 같은 정의의 사나이였는데, 그런 분에게 왜 갑자기 지성이란 잣대를 들이대려 하는가 생각할지 모르겠다. 모두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성품이 지성과 무관하다고 생각한다면 커다란 잘못이다. 내가 보기에 그분이야말로 ‘진정한 지성’의 표본이었다. 이러한 지성의 바탕이 있었기에 그의 감성과 의지는 바른 방향을 향했고, 그 용기는 온몸을 불태워도 아깝지 않을 만큼 당당했다.
사람들은 중학교조차 발을 못 들인 학력만 보고 백 선생이 지성의 세계와는 아예 결별한 것으로 지레짐작할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그의 지극히 순수하고 독창적인 지성을 일구어 낸 원천이었던 것으로 본다. 이렇게 생각한 것은 그간 살펴본 역사적 사례들이 있고, 또 내 나름으로 개인적 경험이 있어서다.
아이작 뉴턴과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경우를 보자. 이들이 지닌 공통점 하나는 10대 시절, 우리로 치면 중고등학교 시기에 몇년씩 제도권 교육에서 벗어나 있었다는 사실이다. 뉴턴은 어머니의 명에 따라 학교를 중단하고 농사일을 해야 했고, 아인슈타인은 제 뜻으로 학교를 그만두고 혼자 공부한 경험이 있다. 만일 이들이 그저 제도권 교육에 머물렀더라도 놀라운 지적 능력을 키워낼 수 있었을까? 아마 그렇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이들이 학교를 벗어난 경험이 홀로 사유하고 홀로 앎을 추구하는 방식을 익힐 중요한 계기가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기회가 있다고 모두 뉴턴이나 아인슈타인이 된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그렇게 할 의지를 가지고 그런 노력을 기울인 사람에게는 이런 경험이 더없이 소중한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나도 작은 경험이 있다. 6·25 전쟁 당시 우리 가족이 조부모 댁으로 귀향해 몇년간 머물렀는데, 무슨 이유에선지 더 이상 학교에 다니지 말라는 할아버지의 엄명이 떨어졌다. 그래서 초등학교를 마저 다니지 못했고, 중학교 대신 동네 안에 차려진 비정규 고등공민학교에 1년 정도 다녀야 했다. 결국 타지로 나가 정규 중학교 2학년 2학기에 가까스로 편입했다. 그간 매우 고통스러웠지만 나 혼자 공부하려고 별별 짓을 다 해 보았다. 사실 책을 읽기는 하지만 이것으로 내가 과연 그 내용을 아는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읽은 것을 다시 공책에 적어 보기도 하고, 들고 다니며 물어보기도 했다. 되돌아보면, 이 과정에서 나는 혼자 공부하는 방법을 몸에 익혔고, 이것이 이후 내 지성을 다듬어 나가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나는 백 선생의 회고록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를 읽으며, 중학교 교육을 받고 싶어 그렇게도 혼자 애쓴 그의 심정과 고뇌를 누구보다도 잘 공감할 수 있었다. 그 처절한 노력에도 그에겐 끝내 정규교육에 복귀할 기회는 오지 않았다. 대신 그는 스스로 중대한 결단을 내린다. “열여섯이 되던 해, 혼자서 세 해 안에 돌배울(중학교) 배우기(6년제 교과서)를 몽땅 해치우기로 한 것이다. … 첫째, 닥치는 대로 외우고, 둘째 닥치는 대로 읽고, 셋째 닥치는 대로 먹는다.” 물론 출발은 우격다짐이 될 수밖에 없다. 우선 영어는 사전부터 몽땅 (과학용어만 빼고) 외워버렸다. 누군가가 독일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책을 못 읽었다고 힐난하자, 이 책을 찾아보기 위해 온 서점과 도서관을 다 돌아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시행착오를 거쳐 끝내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에 대한 깨달음에 이르고 이를 몸에 익히게 된다.
여기까지는 제한된 범위에서 나도 경험했고, 뉴턴도 아인슈타인도 그 과정을 거쳤다. 그런데 그는 끝내 제도권 교육에 복귀하지 않고 일생을 이러한 배움으로 일관했으니, 그 경지가 어디에 가닿았을까. 그 길을 끝까지 함께해 보지 못한 사람으로는 가늠하기 어렵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그가 분명히 엄청난 배움을 체득했고, 또 이에 대한 긍지를 확고하게 지녔다는 점이다. 그의 회고록에 이런 말이 나온다.
“어허, 모르는 소리. 이건 임마, 개구리 노래야. 개구리. 갸들 노래를 내가 꾸어다 부르는 거라고.”
“미친놈, 야 임마, 개구리는 ‘개골개골’ 그래. 너 그것도 모르는 걸 보면 한배울(초등학교) 들어가기 다룸(시험)에서 그나마 미끄러졌구나.”
“야 임마, 난 한배울도 못 다닌 게 아니고 배울(학교)이라면 어떤 것이든 몽땅 다 이고 다녀. 안 보여, 내 머리 위에 있는 한배울, 두배울(중학교), 선배울(고등학교), 모배울(대학교), 그 할애비들, 이것도 안 보이는 걸 보면 네놈은 눈이 있어도 앞을 못 보는 판수로구나 판수.”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205쪽)
나는 그의 철저한 순우리말 표현, 이것 하나만으로도 독보적 지적 산물을 일궈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독창성과 이를 지켜내려는 그의 집요한 행태에 견주어 볼 때, 도대체 “모배울, 그 할애비들”, 이른바 학사, 석사, 박사, 교수들이 안다는 것이 그의 안목보다 더 나을 것이 뭔가? 어쩌면 그의 눈에는 이들이 그저 한심한 먹물들로 비칠 수도 있다. 그들이야말로 책상머리에 앉아 썩은 먹물이나 퍼마셨지, 언제 삶의 밑바닥을 헤매며 피 터지는 현실을 교재 삼아 세상의 참모습을 피부로 느껴본 일이 있는가? 이 진정한 삶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치의 에누리도 없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온 그 날카로운 지성이 그의 말 속에, 글 속에, 노래 속에 그대로 묻어나고 있다.
여기서 한가지 유념해야 할 것은 그가 제도권 교육의 오염에서 온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제도권 교육이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지를 잘 알지 못한다. 그런데 그는 이 점을 일찍이 간파했다. 해방이 되자 하루아침에 가르침의 내용이 180도로 바뀌는 교사들의 태도에서, 남과 북에서 정반대의 것들을 서로 옳다고 가르치는 교육에서, 한 오라기의 허위도 허락하지 않으려는 그의 지성이 상처받지 않고 온전히 피어나기 위해서는 차라리 몸에 스치는 현실을 교재 삼아 자신의 앎을 스스로 깨쳐 나가는 것이 가장 좋은 교육이었고, 그의 지성은 바로 이 교육이 빚어낸 결과였다.
나는 우리의 교육 현장을 인삼밭에 비유한 일이 있다. 인삼밭은 정성껏 토양을 고르고 시비하고 채광을 조절해 인삼이 최적의 조건에서 성장하도록 보살피는 곳이다. 그리하여 5년 혹은 6년을 키워 모두 캐낸다. 더 이상 두면 썩어서 못쓰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제대로 된 삼은 이런 인삼밭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심산 협곡에서 주변의 모든 시련을 이겨내고 십년이고 백년이고 저 혼자 자라온 산삼이 제대로 된 약효를 가진다. 나는 ‘백기완의 지성’이야말로 굵은 산삼 한 뿌리에 해당한다고 본다. 그 안에는 제도권 교육에서는 결코 배양될 수 없는 진실이 담겨 있고 지혜가 담겨 있고 예술이 담겨 있다.
이것이 어찌 백기완 한 사람에게 그칠 일인가? 우리 가운데는 제도권 교육에서 제외된, 혹은 이를 뛰쳐나온, 그러면서도, 어쩌면 그렇기에, 더 뛰어난 지성을 담아낸 사람들이 적지 않게 숨어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 숨은 보물들을 찾아내 그 빛을 발하게 만드는 것 또한 우리 사회가 맡아야 할 중요한 과제이다.
장회익 | 1938년 경북 예천 출생. 서울대 물리학과에서 30여년 교수로 일하다 퇴임하고, 지금은 충남 아산에서 살고 있다. 자유로운 사색을 통해 통합적 학문의 모습을 그려보는 ‘소요거사’로 지낸다. 물리학 말고도 과학이론의 구조와 성격, 생명의 이해, 동서 학문의 비교 연구, 온전한 앎의 성격 등에 관심이 있다. 저서로는 ‘과학과 메타과학’, ‘삶과 온생명’, ‘생명을 어떻게 이해할까?’, ‘공부도둑’(‘공부 이야기’),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 ‘양자역학을 어떻게 이해할까?’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