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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완 3주기 공모전 최우수상> 약자와 늘 함께한 삶, 그 길을...

[백기완 3주기 공모전 최우수상] 약자와 늘 함께한 삶, 그 길을 따르고 싶었습니다

한겨레입력 2024. 2. 22. 19:15수정 2024. 2. 23. 02:35

영원한 니나(민중)의 벗이자 불쌈꾼(혁명가)이었던 고 백기완 선생 3주기를 맞아 백기완노나메기재단과 한겨레신문사는 생전 백 선생과 얽힌 독자들의 추억과 인연을 담은 글을 지난달 31일까지 공모했다. 심사를 거쳐 최우수상 2편과 우수상 2편, 입선 3편을 선정했다. 지난 15일치에 이어 최우수상과 우수상 수상작 한 편씩 싣는다.

고 백기완 선생이 2009년 2월7일 서울 청계광장에서 열린 용산참사 희생자 추모대회에서 함성을 외치고 있다. 통일문제연구소 제공

고 백기완 선생이 2009년 2월7일 서울 청계광장에서 열린 용산참사 희생자 추모대회에서 함성을 외치고 있다. 통일문제연구소 제공

유정열│인천 (야학)한길고 교사

백기완 선생님, 벌써 선생님이 가신 지 3년이 되어옵니다. 그날 시간이 안 돼 나중에 영상으로 선생님이 가시는 마지막 길을 지켜보았습니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집 ‘꿀잠’의 건립 기금 마련을 위해 ‘시대의 2인전 두 어른’을 함께하신 문정현 신부님의 추모사가 가슴에 많이 와 닿았습니다. 2016년 7월에 개막한 그 행사에 선생님은 붓글씨를, 신부님은 서각(書刻)을 수십 점 내셨지요. 작품들을 하나하나 꼼꼼하게 보면서 그 행사의 의미에 대해 함께 간 아내랑 이야기를 나누었던 때가 생각났습니다. 이듬해인 2017년 8월에 드디어 꿀잠 노동자의 집이 개소식을 가졌을 때 가서 선생님을 직접 뵙고 즐거워했던 시간도 떠올랐습니다.

선생님과의 인연은 1987년 겨울에 시작되었습니다. 선생님은 그해 겨울에 민중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셨습니다. 텔레비전에서는 각 당의 후보들이 나와서 연설했습니다. 16년 만에 내 손으로 대통령을 뽑는 것이라 국민의 관심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양복이 아니라 두루마기를 입고 나오신 것도 특이했지만, 맹호 같은 선생님의 모습과 어떠한 것도 무너트릴 수 있는 힘찬 연설은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61살인 어머니와 29살인 저는 선생님께 한눈에 반해버렸습니다. 12월 초였을 겁니다. 어머니를 모시고 서울 강동구 암사동 집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해 대학로까지 갔습니다. 선생님의 유세를 직접 눈으로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어머니와 저는 수많은 인파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발 디딜 틈조차 없다는 표현이 조금도 지나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자리를 간신히 잡고 선생님 얼굴을 보려고 애썼지만, 사람들이 워낙 많아서 대형 스피커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만 들을 수 있었습니다. 아, 어머니와 함께 선생님의 유세를 보러 갔던 그 날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요?

선생님, 2011년 여름에 처음 시작했던 희망버스가 생각납니다. 부산에 있는 한진중공업의 대형 크레인에 올라가서 몇 개월째 농성하고 있던 김진숙씨에게 힘과 용기를 주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희망버스가 그곳으로 떠났잖아요. 저는 6월11일 토요일 제1차 희망버스를 서울시청 앞에서 타서 아주 늦은 밤에 부산에 닿았습니다. 참가자들은 촛불을 들고 현장으로 행진을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잠시 뒤 경찰차가 나타나 불법 집회이므로 즉시 해산하라고 방송했습니다. 그 방송은 끝이 없었습니다. 저는 겁이 많이 났습니다. 행진 도중 다른 곳으로 피하고 싶었습니다. 그때 보았습니다. 선생님이 다른 사회 원로들과 함께 맨 앞에서 걸어가시는 것을. 그러자 조금 마음이 놓였습니다. 한편으로는 나이 드신 분들이 저렇게 앞장을 서시는데, 이제 50대인 제가 그렇게 나약한 마음을 갖는 게 퍽 부끄러웠습니다. 그래서 조금씩 조금씩 행진 대열에 맞추어 걸어갔습니다.

어느덧 한진중공업 담까지 다다랐을 때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별안간 벌어졌습니다. 담 여기저기서 무엇인가가 넘어왔습니다. 담 안에 있는 노동자들이 넘겨준 간이 사다리였습니다. 우리는 재빠른 동작으로 그 사다리를 타고 담을 넘어갔습니다. 선생님도 넘어가셨습니다. 그 안에서 다음 날 무사히 돌아올 때까지 김진숙씨와 우리는 자리를 함께했습니다. 선생님은 그에게 큰 힘을 주셨습니다. 그에 힘입어 희망버스는 계속됐고, 나중에 김진숙씨는 불상사 없이 안전하게 내려올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은 사회적 약자와 늘 함께한 삶을 사셨습니다. 사람들이 아파하고 눈물을 흘리는 곳에, 선생님은 언제나 가셔서 그들과 같이 울었고, 그들을 따뜻하게 안아주셨습니다. 그들은 선생님의 그런 모습에서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것을 여러 매체를 통해 알게 되면서 저도 선생님을 조금이라도 따라가고 싶었습니다. 부당하게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는 현장에 저도 가기 시작했습니다. 서울 용산참사의 유가족 집회에, 쌍용자동차 해고자를 위한 대한문 앞 미사에, 인천 부평의 콜트악기·콜텍 해고자 농성장에, 김용균이 처참하게 사망한 충남 태안 공장 집회 등에 시간이 되는 대로 그들과 함께했습니다. 그 현장에서 맨 앞에 앉아 계신 선생님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선생님 모습을 뵙기만 해도 저절로 힘이 나는 것은 저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고통받은 그들에게는 그 아픔을 잠깐이라도 내려놓을 수 있는 따뜻한 마음의 안식처가 되었을 것입니다.

선생님, 서울 대학로에 있었던 선생님의 통일문제연구소를 찾아가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넓은 방에 앉아 특강을 들었던 때가 문득 그리워집니다. 선생님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이 시대의 천부적인 이야기꾼이셨잖아요. 약자와 함께한 선생님의 삶을 축하하고자 2012년에 세종문화회관에서 팔순맞이 노나메기 잔치 한마당을 할 때 아내랑 같이 가서 흥겨운 시간을 가진 것도 저에게는 소중한 추억이 되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은 저세상으로 가셨지만, 선생님이 생전에 이 땅에 뿌려놓은 참된 삶의 정신은 많은 사람의 가슴속에 오래오래 전해져서 선생님이 바라시는 노나메기 세상을 꼭 만들어나갈 것입니다. 저도 사회적 약자와 늘 함께한 선생님의 뒤를 따라 그 대열에 굳세게 나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