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

<경향신문> 송경동의 사소한 물음

1000송이의 국화와 야생화의 바람

 송경동 시인

백기완 선생님 3주기 추모대회가 지난 토요일 오후 대학로에서 열렸다. 추모로만 끝낼 수는 없어 올해도 사람들이 모여 투쟁대회와 행진을 조직했다. ‘학살과 착취를 멈춰라’는 외침 아래 장애인, 철거민, 도시빈민들, 비정규노동자들, 그리고 평생을 거리와 광장에서 함께해 온 원로 선생님들이 같이했다. 뼛속 깊이 저항의 의지로 다져진 그들 민중의 열기로 모처럼 거리가 환해지는 기분이었다. 1000송이의 국화꽃과 야생화를 들고 이스라엘 대사관을 거쳐 이태원 분향소까지 나아가며 분노할 일만 태산처럼 쌓여가는 작금의 현실을 직시해보았다.
세계의 진보와 평화와 평등을 짓밟으려는 자본주의와 제국주의 세력의 폭력과 야만이 다시 세계 도처에서 학살을 자행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우크라이나, 미얀마…, 그 외 세계 도처에서 소수 자본과 권력의 천문학적인 이윤과 지배와 독점을 위해 수많은 인류와 지구생명체들이 피눈물을 흘리며 죽음 앞으로 내몰리고 있다. 세계적 독점은 극에 달해 상위 10%가 전 세계 전체 소득의 52%, 자산의 76%를 차지하고, 80억명분의 식량이 생산되는데 해마다 210만명이 굶주려서 죽는 불의한 시대. 과잉생산과 개발, 소비 등으로 지구의 생명이 5년 반밖에 안 남았다는 충격적인 보고가 제출되어 있다.
생명의 이름으로 야만의 시대 종식
다시 지구촌에 도래한 전쟁과 야만의 시대는 그 생명이 다해가는 역사적 자본주의 체제 스스로가 직면한 심각한 존명의 위기를 모든 지구인의 위기, 모든 생명체의 위기로 전가시키는 가공할 죄악에 다름 아니다. 모두의 고통과 고난에 기생해 부정의하게 생명을 연명하려는 추악한 시도와 다름이 없다.
우리는 그들 소수 권력과 자본이 자신들의 부패와 그릇된 욕망을 가리기 위해 자행하는 가증스러운 선전 선동, 진실에 대한 왜곡, 학살을 정당화하는 어떤 죄악에도 동의하지 않으며, 불의한 전쟁과 야만의 종식을 위해 모든 생명의 이름으로 견결히 투쟁해 나가야 할 것이다.
몇해 전 우리 모두가 모여 이룬 촛불항쟁의 결실은 이제 쭉정이만 남고 한국사회의 야만 역시 다시 못된 머리를 높이 쳐들고 있다. 여야 정치권과 윤석열 정부가 무능과 부패, 탐욕과 착취라는 내로남불을 주고받으며 민주주의와 노동자민중의 권리, 소수자들의 권리, 기후정의에 대한 요구 등을 모든 곳에서 짓밟고 모욕하며 파괴하고 있다.
선거철이면 립 서비스로나마 듣던 말들도 올해는 듣기 힘들다. 무엇을 위해 정치를 하겠다는 말들인지 알 수조차 없다. 재벌해체 및 개혁, 비정규직 철폐 등 노동기본권 확장, 남북의 평화공존 및 통일, 공안통치와 그 기관들의 종식, 성평등과 가부장제 폐지, 사회복지와 공공성 강화, 위험 및 차별사회 근절, 정치-선거제도 개혁, 사법과 검찰 개혁, 교육과 언론개혁, 문화다양성 존중 등 모든 시대적 과제가 부정되고 논의조차 실종된 ‘양아치들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노조법 2·3조 개정과 언론법, 양곡관리법, 이태원참사특별법 등이 모두 거부되는 초유의 반민주, 반노동자민중, 반평화와 평등의 시대를 눈앞에 목도하며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다. 그릇된 세대별, 성별, 계층별 갈등을 무한조장하며 근본적인 시대의 요구를 가리고 왜곡시키는 이데올로기 공작 역시 가증스럽다.
이 모든 학살과 착취, 야만의 공세에 맞서 우리 모두의 존엄과 정의를 똑바로 세워야 할 때다. 부당하고 부조리한 현실을 핑계로 한 원칙을 버린 정치적 타협과 나약하고 불의한 공생의 흐름을 끊고 투쟁과 저항의 연대전선을 더 강하고 더 넓고 깊게 다시 세워나가야 할 때다. 소외되고 차별받으며 탄압받는 모든 사회적 역사적 존재들이 앞장서서 세계사와 한국사를 함께 관통하는 진보의 의제, 생명과 평화, 정의로운 공존의 의제를 분명히 하고, 그 새로운 사회로의 이행을 위한 광활한 실천과 꿈꾸기에 다시 나서야 할 때다.
다시 거대한 광장의 물결로 설 것
백기완 선생의 3주기를 맞아 모인 이들은 그 정의로운 투쟁에 함께할 것을 결의했다. 모든 학살과 착취, 부정의 앞에서 죽어간 모든 이들을 기억하고 추모하며 1000송이의 국화꽃을 들고 비장한 마음으로 나아갔다. 모든 생명의 안전과 행복, 평화와 평등, 존엄의 회복을 위해 굳세게 나아갔다.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는 엄연한 진실과 오랜 믿음을 향해 힘차게 나아갔다. “가자. 새로운 민중의 세계로! 가자. 새로운 평등평화의 세계로!” 지금은 비록 우리 가난하지만 언젠간 다시 거대한 광장의 물결로 서 나가리라.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402192001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