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기완재단_지리산 답사 기행문 3편> 거창민간인학살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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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완노나메기재단의 지리산 역사기행_빨치산의 흔적을 찾아서②]
근현대사 역사탐방을 진행하고 있는 백기완노나메기재단이 지난해(2025년) ‘동학혁명 김개남 장군의 발자취를 찾아서’ 탐방에 이어 올해는 '지리산 빨치산의 흔적을 찾아서'(9.11~12) 역사 탐방을 다녀왔습니다. 지리산 기행문을 세 차례에 걸쳐 독자들께 전합니다. <기자말> [박상주 기자] 2026. 9. 23. 07:52
거창학살 유족이 훼손된 위령비 그대로 두기로 한 까닭
지리산 뱀사골 초입의 '일출 산채식당'에서 아침을 먹었다. 지리산에서 나는 30여 가지 나물과 찌개로 차려진 푸짐한 아침상이었다. 개운한 버섯전골과 얼큰한 김치찌개는 전날 마신 막걸리 숙취를 푸는 데 그만이었다.
아침 식사 자리에 산내면 면장을 지낸 박석만씨가 나타났다. 박 면장은 식당주인에게 백기완재단 답사단을 잘 대접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여러 해 전 면장직을 그만두었지만 주민들 사이에서 여전히 두터운 신망을 얻고 있었다. 박 면장은 전날 답사단과 함께 뱀사골 일정을 함께하면서 숨겨진 빨치산 이야기를 들려 주기도 했었다.
느긋하게 아침을 먹은 뒤 버스에 올랐다. 산채식당 사장님이 직접 재배한 포도라면서 몇 박스 버스에 실어주었다. 백기완재단의 '빨치산의 흔적을 찾아서' 답사팀은 뱀사골과 의신지구, 화엄사 등을 둘러보는 지리산 일정을 마친 뒤 마지막 일정인 거창학살 현장으로 향했다.
움직이는 강의실, 손호철 교수가 마이크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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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창 ‘박산합동묘역’에 세운 위령비가 파헤쳐져 쓰러져 있다
ⓒ 백기완노나메기재단
새로운 답사 현장으로 이동하는 버스는 움직이는 강의실이다. 답사단 길라잡이인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가 마이크를 잡았다.
"흔히 거창학살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민간인 학살은 1951년 2월 7일 산청과 함양에서 먼저 시작됐습니다. 군인들은 이틀 후 거창으로 이동해 학살을 이어갔지요. 왜 거창학살로만 알려져 있을까요? 당시 거창 지역구의 신중목 의원이 학살을 폭로했기 때문입니다. 그해 3월 말 국회·정부 합동조사단이 거창으로 파견됐습니다. 그러나 경남계엄민사부장 김종원 대령이 부하들을 빨치산으로 위장 시켜 매복했다가 조사단에 총격을 가하는 일이 벌어졌어요. 김종원은 여순학살을 주도한 인물이었습니다. 현장 조사는 무산되었지요. 하지만 외신 보도를 통해 사건의 전모가 드러났습니다. 김종원은 군사재판에 넘겨져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지요.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이 그를 '이순신 같은 애국자'라며 두둔한 끝에 곧 특별 사면되었습니다."
1시간 여 달린 버스는 한적한 도로변에서 정차했다. 야트막한 구릉에 봉분 3개가 나란히 조성돼 있었다. 무덤 앞에는 흙 먼지를 잔뜩 뒤집어 쓴 대리석 위령비가 땅바닥에 나 뒹굴고 있었다.
큰 봉분 두개의 상석(床石)에는 남자합동지묘(男子合同之墓)와 여자합동지묘(女子合同之墓)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그 옆의 작은 봉분에는 소아합동지지(小兒合同之地)라는 표석(標石)이 세워져 있었다. 거창사건 희생자들을 모신 '박산합동묘역'이 모습이었다.
북어포와 과일을 차려놓은 뒤 신학철 재단 이사장과 정지영 감독이 잔을 올렸다. 40여 명의 답사단원들이 일동 묵념으로 예를 갖췄다. 손 교수가 묘역을 둘러보다가 입을 열었다.
"국군 토벌대는 이곳에서도 '견벽청야(堅壁淸野)' 작전을 벌였습니다. 빨치산이 이용할 수 있는 마을들을 아예 쓸어버리는 초토화 작전을 벌인 겁니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죽였어요. 갓 태어난 신생아까지 무차별 학살했습니다."
묘역 앞에는 거창사건 희생자 유족회 명의로 된 알림판이 세워져 있었다. '위령비가 파괴되어 쓰러져 있는 까닭!'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알림판은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시작했다.
"거창양민학살사건은 1951년 2월 9일에서 11일사이 국군 11사단 9연대 3대대에 의해, 덕산리 청연골에서 주민84명, 대현리 탄량골에서 주민 100명, 과정리 박산골에서 주민 517명, 기타지역에서 주민 18명, 모두 719명의 주민이 학살되었다. 그 중에서 중유리 대현리 와룡리 주민 800여명을 신원초등학교에 감금하고 군인, 경찰, 방위대가족을 제외시킨 517명을 박산골에 끌어넣고, 총으로 잔혹하게 학살을 하여, 나무로 덮고 기름을 뿌려 태워 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천행으로 살아남은 유족들이 가족의 시신을 수습하려 했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은 3년 동안 학살 현장의 접근을 막았다. 1954년 4월에서야 박산골에 방치되어 있던 시신들을 수습할 수 있었다. 손 교수의 설명이 이어졌다.
"3년이나 방치된 시신들은 신원을 파악할 수 없는 상태였어요. 유족들은 큰 유골은 남자, 중간 유골은 여자, 작은 유골은 어린이로 분류해 화장했습니다. 그 유골들을 이곳으로 모셔 와 무덤 세 개로 나누어 무덤을 쓴 것입니다."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졌다. 그동안 숨죽여 살던 유가족들이 거창사건 희생자 유족회를 결성하고 본격적인 명예회복 운동과 위령사업을 추진했다. 그해 11월 유족과 면민들이 뜻을 모으고 도청의 지원까지 받아 위령비를 세웠다.
쿠데타 세력이 일으킨 제2의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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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창 ‘박산골학살터’에서 설명하는 길라잡이 손호철 교수
ⓒ 백기완노나메기재단
이듬해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다. 박정희 쿠데타 세력은 거창 희생자 유족회 간부들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하여 잡아 가두었다. 1962년 6월 최갑중 경남 도지사는 합동묘를 없애라는 명령을 내렸다. 손 교수의 설명이 이어졌다.
"최갑중의 지시에 따라 묘는 파헤쳐졌습니다. 위령비는 정으로 쪼아 훼손한 뒤 땅 속에 묻었습니다. 유족들에게는 뼈 가루 한 줌씩을 나누어 주었을 뿐이었습니다. 제2의 학살을 저지른 것이지요."
이후 유족들은 "봉분이라도 원상복구 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각계에 호소했다. 1967년 8월 유족들의 끈질긴 노력 덕에 합동묘 봉분을 다시 조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학살의 진상을 담은 위령비는 여전히 햇빛을 볼 수 없었다. 손 교수는 위령비를 땅 속에서 꺼낼 수 있었던 배경은 민주화였다고 말했다.
"1987년 6월 항쟁이 일어났습니다. 26년간의 군사독재가 끝나고 민주화가 진행됐습니다. 1988년 2월 땅속에 묻혀 있던 위령비도 파낼 수 있었습니다. 단 과거를 기억하기 위해 위령비를 훼손 된 모습 그대로 두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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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원 입구는 거창사건추모공원으로 표기한 알림판
ⓒ 백기완노나메기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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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창 ‘박산합동묘역’에서 묵념으로 예를 갖춘 답사단
ⓒ 백기완노나메기재단
박산합동묘역을 둘러본 뒤 건너편 거창사건추모공원으로 이동했다. 박산합동묘역이 유족들의 손으로 만든 무덤이라면, 거창사건추모공원은 국가가 조성한 공식 추모와 역사교육의 공간이었다. 거창사건추모공원 입구엔 한옥식 문루인 천유문(天羑門)이 높다랗게 세워져 있었다. 천유문 앞쪽에 공원 알림판이 세워져 있었다.
'이 곳은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인 6.25전쟁 중, 1951년 2월 9일에서 11일까지 거창군 신원면에서 일부 국군에 의해 집단적으로 희생당한 양민들의 넋을 위로하고 그들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하여 조성된 거창사건 추모공원입니다. 이 공원은 1996년 「거창사건 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제정에 의해 추진된 사업으로써 총 부지면적 162,425㎡ 규모의 합동위령사업을 1998년에 착공하여 2004년에 준공되었습니다.'
알림판을 들여다보던 손 교수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같은 공원이지만 알림판마다 거창학살에 대한 표기가 다릅니다. 천유문 바깥쪽은 '거창사건'이라고 표기를 한 반면 문 안쪽에서는 '거창양민학살사건'으로 쓰고 있습니다. 민간인 학살을 '사건'이라고 표현해서야 되겠습니까? '양민학살'로 표현한 것 역시 잘못입니다. 거기에는 양민이 아닌 사람은 학살해도 된다는 함의가 포함돼 있습니다. '거창민간인학살'이라고 해야 맞습니다."
실제로 공원입구에는 '거창사건추모공원'이라고 적혀 있었지만, 공원 안으로 들어서니 '거창양민학살사건판결문비'와 '거창 양민학살사건 안내도'처럼 '양민학살사건'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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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원 안쪽에는 거창양민학살사건으로 표기한 알림판
ⓒ 백기완노나메기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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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창 ‘박산합동묘역’에서 잔을 올리는 신학철 재단 이사장
ⓒ 백기완노나메기재단
올바른 역사의 정립은 정명(正名)에서 시작된다. 같은 일을 '학살' 혹은 '사건'이라 부를지, '항쟁' 혹은 '반란'이라고 부를지에 따라 무엇을 기억하고 어떻게 기록할 것인지가 달라진다. 이름을 바로 세우는 일은 곧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이다.
공원 알림판 옆 쪽엔 '신중목 국회의원공적비'가 세워져 있었다. 신 의원은 한국전쟁 당시 거창군 지역구 국회의원으로 활동한 인물이었다. 공적비에는 피난 수도 부산에서 거창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에 앞장섰던 신 의원의 활약상이 담겨있었다.
"(…)신의원은 참담한 사실에 망연자실하였지만 사건의 진실을 밝혀내야겠다는 일념으로 국회 본회의에서 국방을 책임진 군이 국민을 무차별 학살한 것은 어떤 이유에서도 용서 할 수 없는 천인공노할 만행임을 정의롭게 폭로하여 온 국민의 공분과 함께 만천하에 진실을 알리었다. (…)"
공원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공원 한복판에 18m 높이의 위령탑이 세워져 있었다. 거창 희생자들의 영혼이 무덤을 벗어나 하늘로 솟아 오르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었다. 위령탑 너머 언덕엔 719기의 희생자를 모신 '거창사건 희생자 합동묘역'이 조성돼 있었다. 합동묘역 앞에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시 한 편이 새겨져 있었다. 거창 출신 시인인 표성흠의 시였다.
"잊지마라, 여기 이곳을
상처 뿐인 아픔을 치유 하고
땅에 묻혔던 거창사건의 명예를
회복하는 현장이다.(…)
길손들은 여기 이곳을 그냥
무심코 지나지 마시라.
무언가 생각들을 해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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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모공원일까 놀이공원일까
ⓒ 백기완노나메기재단
무언가 자꾸 거슬렸다. 공원 곳곳엔 캥거루와 미키 마우스, 판다, 텔레토비 등 여러 동물과 캐릭터 모형들이 세워져 있었다. '거창학살추모공원'이라는 조형물을 가운데 두고 양쪽에 활짝 웃으면서 바이올린을 켜는 모습의 개미와 베짱이 캐릭터는 추모가 아닌 조롱으로 느껴졌다.
백기완재단 살림꾼인 채원희 사무처장이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이게 도대체 뭐하는 짓인가. 여기가 무슨 아이들 놀이공원인가."
불편한 마음을 안고 공원을 빠져나왔다. 함양 시내에 들러 닭백숙으로 점심을 먹었다. 이제 1박2일 동안 지리산 빨치산 흔적과 거창의 민간인 학살 유적을 둘러보는 백기완재단의 '빨치산의 흔적을 찾아서' 일정이 마무리되고 있었다. 서울로 올라가는 버스에 올랐다. 백기완재단의 양기환 이사가 마이크를 잡더니 재단활동과 현황에 대한 설명을 했다.
"백기완 선생님의 삶은 민중의 역사였습니다. 백 선생님의 발자취는 민중의 유산입니다. 백기완 재단은 선생님의 저서와 인터뷰, 강연, 활동 등을 기록으로 집대성하는 작업을 하고 있어요. 학자들을 중심으로 백기완 사상을 정립하는 일도 진행 중입니다. 우리 사회 민주화 운동의 거점이었던 백기완 마당집(기념관)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백기완 재단은 선생님의 생전 뜻대로 민중들과 비가 내리면 같이 비를 맞는 활동도 이어가고 있습니다."
백기완재단은 내년엔 제주 4·3을 찾아간다. 제주4.3은 '항쟁'일까, '반란'일까, '학살'일까, '사건'일까? 역사는 기억하고 기록하는 사람들의 차지다.
신학림 전 언노련 위원장이 양 이사로부터 마이크를 이어받았다. 현역기자 시절 오랜 동안 정치부 기자 생활을 했던 신 전 위원장이 흥미진진한 현대사 비화를 쏟아냈다. 김대중과 김영삼 전 대통령,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 등의 성대 모사와 함께 풀어내는 그의 정치 만담에 버스 안은 폭소가 그치지 않았다. 어느새 버스는 서울로 들어서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백기완노나메기재단 회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