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백기완의 심산상 수상(2020.11.05)
백기완, 민족 민주 민중의 시대를 위해 살아온 장산곶매
오제연(성균관대 사학과)
백기완 선생님은 1933년 황해도 은율에서 태어났습니다. 선생님이 어린 시절 고향에서 할머니와 어머니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모아 엮은 <장산곶매 이야기>라는 책 속에는 다음과 같이 ‘장산곶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옛날 옛날에 황해도에 구월산 줄기가 바다를 향해 쭉 뻗다가, 뚝 끊어진 ‘장산곶’이라는 마을이 있었다. 이 장산곶 숲속에 날짐승 중 으뜸이라 할 수 있는 매가 살았는데 그 중 으뜸인 장수매를 일컬어 장산곶매라 한다. 이놈은 주변의 약한 동물은 괴롭히지 않고 일년에 딱 두번 대륙으로 사냥을 나가는데 떠나기 전날 밤 부리질을 하며 자기 둥지를 부수어 낸다. 장산곶 매가 한 번 사냥을 나선다는 건 생명을 건 혼신의 싸움이었으므로 그 부리질은 마지막 입질 연습이요, 또한 그것을 통해 자신의 마지막 안식처까지 부수어 내며 자신의 정신적 상황을 점검했던 것이다. 장산곶 사람들은 매가 부리질을 딱딱 시작하면 마음을 조이다가 드디어 사냥을 떠나면 바로 그 순간 봉화를 올리고 춤을 추며 기뻐하였다. 장산곶매가 사냥을 떠나면 아픈 자는 병이 낫고, 장가 못간 총각은 아내를 얻고, 분통에 떠는 머슴들이 그날 난을 일으키면 성공한다는 전설이 있기 때문이다.
상처 입고 찢겨진 민족의 통일을 위해, 독재와 불의에 맞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그리고 소외되고 억압 받는 민중을 위해 일평생 매진한 백기완 선생님의 삶은, 곧 장산곶매의 삶 그 자체였습니다. 이에 간략하게나마 선생님의 삶을 되돌아보며 그 의미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민족과 백기완
백기완 선생님의 여러 직함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아마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일 것입니다. 통일문제연구소는 1984년에 만들어졌지만 전신인 백범사상연구소가 1972년에 만들어졌으니까 벌써 5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습니다. 1972년 백범사상연구소의 설립 목적은 “백범의 얼을 자주적 민족문제 해결의 실천적 과제로 연구 발전시키기 위해 백범의 혁명노선 사료를 수집, 체계화하고 그의 애국사상을 널리 전파하는 것”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백범의 자주적인 진보지향과 민족사상의 진원을 캐기 위해 그의 항일투쟁 및 전후 냉전체제 하 외세를 거부하는 그의 사상도 연구 조사”하였습니다.
백범 김구와 선생님은 선생님이 태어나기 전부터 인연이 있었습니다. 1895년 명성황후가 궁궐 안에서 일본인들에게 무참하게 살해당하는 사건(을미사변)이 발생하자, 김구는 이에 연루되었다고 판단하여 한 일본인을 죽였습니다. 체포된 김구는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곧 탈옥하여 마곡사에 은신하였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자신의 고향인 황해도로 잠입하여 선생님의 할아버지 집에 잠시 머물렀습니다. 이때 할아버지는 영웅이 오셨다며 김구를 극진히 돌보아 주었습니다.
선생님의 할아버지는 이후로도 독립군의 군자금을 대주는 활동을 하였고, 3.1운동 당시에는 수천 장의 태극기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독립운동으로 인해 일본 경찰에 잡혀가 고문을 받게 되고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선생님 집안의 가세도 크게 기울었습니다. 1945년 8.15해방 후 이듬해 선생님은 아버지와 함께 고향을 떠나 서울로 왔습니다. 그리고 1948년경 과거 할아버지 때의 인연으로 백범 김구를 직접 만나 남북협상과 통일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당시 김구는 선생님에게 <백범일지>에 직접 휘호(시)를 적어 선물로 주기도 했습니다. 독립운동가 집안 출신으로 김구와 인연을 가진 백기완 선생님이 평생을 민족운동, 통일운동에 헌신했던 것은 하나의 숙명과도 같아 보입니다.
또 하나 선생님의 민족사상에 영향을 준 것은 1965년에 있었던 한일협정 체결입니다. 1961년 5.16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는 부족한 정권의 정당성을 ‘조국근대화’, 즉 경제성장을 통해 보완하기 위해 일본으로부터 대규모 자금을 들여오려 했습니다. 하지만 일본과의 협정 체결을 서두르면서 많은 것을 양보하는 바람에 ‘굴욕적’ ‘매국적’ 협상이라는 거센 비판에 직면했습니다. 백기완 선생님도 1965년 8월 한일협정의 국회비준을 비판하는 비상국민대회에 연사로 나서 한일협정을 강력하게 비판한 뒤 시위를 벌이다 함석헌 등과 더불어 불구속 입건된 바 있습니다. 한일협정 반대운동 과정에서 선생님은 장준하와도 깊은 인연을 맺게 됩니다.
한일협정 체결 당시 선생님이 특히 비판한 지점은 자본을 앞세운 일본의 재침략이었습니다. 한일협정 체결 뒤에도 선생님은 대학가 강연 등을 통해 이를 계속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1972년 그 간의 생각들을 정리한 책 <항일민족론>을 간행하여 사회적으로 큰 관심을 끌었습니다. 선생님은 ‘항일민족주의’의 관점을 가지고 과거 한국을 식민지배한 일본이라는 거울을 통해 현대 일본의 실체를 찾으려 했습니다. 당시 언론에서는 이 책에 대해, 한일협정 체결 이후 쏟아져 들어오는 일본의 문물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이에 의존하려는 행태에 “명쾌한 논리와 높은 격조”로 경종을 울렸다고 평가했습니다.
<항일민족론>의 안표지에는 과거 백범이 직접 써 준 휘호가 인쇄되어 있습니다. 이 책 간행 직후에는 백범사상연구소가 만들어졌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백기완 선생님의 민족 문제에 대한 고민에는 일관성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의 민족사상은 고정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1972년 10월 유신 선포와 유신체제 수립 이후 독재가 극단으로 치달으면서 선생님의 민족사상은 민주화운동과 결합하여 더욱 심화하는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민주주의와 백기완
20대 청년시절인 1950년대에 백기완 선생님은 농촌계몽운동과 산림녹화사업에 적극 나섰습니다. 그러다 1960년 4.19혁명을 맞이합니다. 4.19혁명 직후 치러진 7.29총선에 선생님은 서울에서 무소속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결국 낙선을 하였습니다. 4.19혁명으로 열린 민주주의의 문은 그러나 곧이어 발생한 5.16쿠데타로 다시 닫히게 됩니다. 1963년 민정이양 국면에서 선생님은 자유대중당이라는 정당을 발기하여 쿠데타로 짓밟힌 민주주의를 회복하고자 하였습니다. 하지만 선거 직전 현실의 부조리와 군사정부의 신악(新惡) 앞에서 창당 등 모든 정치활동을 포기하고 지역사회개발운동으로 선회하였습니다.
1969년 박정희 정권이 장기독재의 서막을 알리는 3선개헌을 추진하면서, 선생님은 다시 민주주의 문제와 씨름하게 됩니다. 1967년 총선을 앞두고 4.19세대의 일원으로서 정치 일선에 뛰어든 선생님은, 1969년 3선개헌을 저지하기 위해 결성된 ‘3선개헌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의 발기인으로 이름을 올립니다. 그리고 전국을 돌며 3선개헌을 반대하는 각종 집회에서 연사로 나서 강하게 박정희 정권을 비판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선생님은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허위사실을 유포했다는 혐의로 입건되기도 했습니다.
1972년 10월 유신이 선포되고 유신체제가 수립되자 선생님은 더욱 치열하게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합니다. 1973년 12월 백기완 선생님은 장준하와 함께 각계 인사들을 규합하여 현행헌법(유신헌법) 개정을 요구하는 백만인 청원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연말에 열린 ‘항일민족문학의 밤’ 행사를 이용하여 유신헌법 개정을 요구하는 대규모 집회를 개최하기도 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유신헌법 개정 요구가 급물살을 타게 되자 1974년 1월 박정희 정권은 유신헌법에 대한 일체의 개정 논의를 금지시키는 ‘긴급조치 1호’를 발동하였습니다. 그 결과 선생님은 긴급조치 1호 위반 혐의를 구속 기소되었고 징역 12년을 선고받았지만, 1975년 2월 일시적인 유화국면 하에서 석방되었습니다.
19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의 사망으로 민주주의의 봄이 오는 듯 했으나 실제로는 더 큰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사망 직후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정부와 계엄당국은 공석이 된 대통령을 유신헌법에 근거해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간접선거로 선출하려 했습니다. 이에 백기완 선생님 등 재야인사들은 1979년 11월 계엄당국의 감시를 피해 명동YWCA강당에서 결혼식을 가장하여 이 선거를 반대하는 집회를 열었습니다. 집회를 주도한 혐의로 계엄군에 체포된 선생님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혹독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재판에서 징역 1년6개월을 선고받았지만 고문 피해 때문에 1980년 5월 병보석으로 석방되었습니다. 선생님은 이후에도 계속 그 후유증에 시달렸습니다.
백기완 선생님은 1980년대 내내 대학생 등을 대상으로 민족, 통일, 민주주의, 그리고 민중에 대한 강연을 지속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강연 내용이 문제가 되어 수시로 경찰에 연행되거나 또는 아예 가택 연금을 당하여 강연 자체가 좌절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선생님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습니다. 1985년 재야 민주세력이 결집하여 조직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에서 서울지부장, 부의장을 맡았고, 1987년에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를 만드는데 앞장섰습니다. 6월항쟁에서도 선생님은 민통련과 국본을 중심으로 활동하였습니다. 그리고 6월항쟁은 마침내 직선제 개헌을 이루어냄으로써 본격적인 민주화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민중과 백기완
1987년 6월항쟁과 직전제 개헌으로 민주화의 길이 열리자, 보수야당의 두 지도자 김영삼과 김대중 사이의 후보 단일화 문제가 현안으로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그 누구도 대통령후보를 포기하지 않았고 민주세력 역시 두 사람의 지지 여부에 따라 양분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백기완 선생님은 일관되게 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가 당면과제임을 역설하였습니다. 민주세력 내에서 진보적인 민중후보를 추대하려 했던 사람들은 선생님을 대통령후보로 적극 추천했습니다. 당시 맨 처음 백기완 선생님을 대통령후보로 지지했던 문건 속에 언급된 추천의 이유는 선생님의 진면목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백기완 선생은 우리나라 민주화와 이 겨레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위하여 한평생 바치겠다는 뜻을 세운 이래 변치 않고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쳐왔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선생의 순수성이 의심받아 마땅한 행동을 단 한 번도 저지른 적이 없었다.”
1987년 12월 대통령 선거 당시 백기완 후보가 일으킨 돌풍은 대단했습니다. 특히 대학로 유세에는 수십만의 청중이 몰려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그럼에도 김영삼과 김대중 두 사람의 분열로 민주세력의 패배 가능성이 갈수록 커지자, 선생님은 양김과 대화를 통해 마지막까지 후보 단일화를 모색하다 결국 선거를 불과 이틀 앞두고 사퇴를 전격 선언하였습니다. 선생님의 사퇴가 지지자들에게는 커다란 안타까움이었지만 대승적 결단이었습니다. 백기완 선생님은 이렇게 우리 현대사에 유일무이한 ‘민중후보’로 각인되었습니다.
선생님의 사퇴가 양김의 분열과 노태우의 당선을 막지는 못했지만, 그것이 선생님의 의지와 실천을 꺾을 수는 없었습니다. 1989년 통일운동이 고양되자 선생님은 문익환, 계훈제 등과 함께 남북정치협상과 남북범민족대회를 추진하였고, 1991년 5월 대학생들의 시위와 죽음이 계속되자 범국민대책회의의 고문을 맡아 학생들의 편에 섰습니다. 5년 만에 돌아온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 진보적 민주세력은 다시 한 번 백기완 선생님을 민중후보로 추대하였으나, 조직과 자금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낙선은 피하기 어려웠습니다.
2000년대에 들어와서도 백기완 선생님은 소외되고 어려움을 당하는 민중들과 한결 같이 함께 했습니다. 일례로 한진중공업 파업 당시 크레인에 올라가 고공시위를 벌이던 김진숙을 응원하기 위해 ‘희망버스’에 1차로 올라탔던 사람이 바로 선생님이었습니다.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지역주민들과 연대하기 위해 애썼던 사람 역시 선생님이었습니다. 2016년 촛불집회 현장에서도 노구를 이끌고 나선 선생님의 모습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2018년 심장수술로 몸이 많이 약해지셨지만 2019년 <버선발 이야기>를 출간하는 등 선생님의 열정은 아직 식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은 영원한 현역이고 보기 드문 이 시대의 어른이십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백기완 선생님은 삶은, “민중의 노력만이 민주주의도 통일도 이루어낸다”는 굳은 신념 속에서 가능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는 평생을 독립투쟁과 반독재 민주통일운동에 헌신한 심산 김창숙의 삶과 매우 닮아 있습니다. 두 분 모두 우리 역사, 우리 사회의 장산곶매입니다. 따라서 백기완 선생님이 “이 시대의 불의에 대한 저항과 민족의 창조역량을 고양하는 학술 및 실천 활동에서 공로가 큰 이”에게 수여하는 심산상을 수상하는 것은 당연할 뿐 아니라 만시지탄의 감이 있습니다. 선생님께 축하의 말씀을 드립니다.
-----2020.11.03
[여적] 백기완의 심산상 수상
심산 김창숙은 안중근·한용운과 함께 1879년생 동갑내기다. 건국훈장 1등급인 대한민국장을 나란히 받은 점도 같다. 안중근과 한용운이 각각 의병과 승려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면 심산은 유학자로 구국운동을 펼쳤다. 심산은 ‘실천하는 선비’였다. 을사늑약 때에는 오적을 처단하라는 상소를 올렸고, 3·1운동 때는 ‘파리장서’ 사건을 주도했다. 1920~1930년대에는 의열단의 무장투쟁을 지원했다. 투옥과 고문으로 점철된 독립운동 끝에 남은 것은 불편한 두 다리뿐. 심산은 스스로를 ‘벽옹’(앉은뱅이 늙은이)이라 불렀다.
심산의 실천적 삶은 해방 뒤에도 이어졌다. 그는 이승만 정권에 맞서 반독재·통일 운동을 벌이다 다시 옥고를 치렀다. 명문가 출신이었으면서도 그의 삶은 권력과 부와 멀었다. 유림이었지만, 새로운 유학을 꿈꾼 개신 유학자였다. 전원에서 음풍농월하는 고루한 유림들에 반대한다는 뜻으로 ‘반귀거래사’를 짓기도 했다. 해방 후에는 친일유림을 해체하며 유도회 조직을 통폐합했고, 성균관대를 설립해 초대 총장에 올랐다. 1986년 후학들은 이런 심산의 꼿꼿한 뜻을 기리기 위해 심산상을 제정했다.
심산김창숙연구회가 제22회 ‘심산상’ 수상자로 통일문제연구소 백기완 선생을 선정했다. 연구회는 “백기완 선생이 군사독재의 폭압에 맞서 결연히 투쟁했고 민족의 통일을 앞당기기 위해 힘써왔다”며 선정 이유를 밝혔다. 불의에 맞서고 평생을 민주화와 통일운동에 헌신해온 백기완 선생은 심산의 일생과 매우 닮았다. 그간 ‘우리말 으뜸 지킴이상’ 이외에 제도권의 상과 훈장을 일절 거부해온 백 선생이 심산상을 기꺼이 수락한 이유다.
백 선생은 토박이말로 우리의 민담·통일론을 써온 작가이기도 하다. 연구회는 ‘자주고름 입에 물고 옥색치마 휘날리며’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와 같은 책 제목들이 당대 언어로 두루 회자됐다면서 백 선생 저작에 의미를 부여했다. 그의 삶과 사상에 대한 학술적 조명은 이제 시작이다. 시상식은 오는 6일 성균관대에서 열리는데, 10개월 넘게 와병 중인 백 선생은 참석하지 못한다. 벽옹이 불편한 다리를 끌고 대륙을 종횡했듯이, 백기완 선생이 심산상 수상을 계기로 병상에서 떨쳐 일어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