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기완 4주기> 신학철 백기완을 부르다_보도자료
[전시서문]
신학철, 백기완을 부르다
백기완 마당집을 마주 보면, 왼편에 우람하지도 왜소하지도 않은 살구나무 한 그루가 조용히 서 있다. 뒤편 아래 작은 설명글이 붙어 있다.
■ 올해도 살구꽃 피고 지고
백기완은 살구꽃을 좋아했다. “양반들은 붉은빛이 도는 화려한 복사꽃을 좋아했지만, 우리 민중들은 자연의 빛깔을 닮은 발그스레한 살구꽃을 좋아했어.” 이 얘기를 들은 그림꾼 신학철은 자기 집 뜰에 달린 살구를 따 씨앗을 심었고, 싹이 트자 손바닥만하게 키운 어린 나무를 가져왔다.
2005년 이 자리에 옮겨 심고, 두 사람은 그렇게도 환하게 웃었다. 신학철 화백이 백 선생의 어릴적 이야기 ‘부심이의 엄마생각’ 연작 그림을 한창 그려줄 무렵이었다.
백기완은 살구나무에 정성을 쏟았다. 작고 얕은 화단에서 뿌리를 깊게 내리지 못하자 찬바람이 불어오면 막걸리를 사다가 몇 달을 삭힌 뒤 나무에 부어주었다.손수 키운 나무에 꽃이 피고, 노오란 열매가 맺히자 아이처럼 좋아했다. 살구꽃 피는 봄이 오면 여러 벗들을 불러 모아 사람 이야기꽃을 피웠다. 신경림 시인의 <월악산의 살구꽃>을 ‘벽시’에 새겨 넣고 함께 읊으며, 시에 담긴 슬픔과 위로, 역사적 상징성과 혁명적 의지에 대해 힘주어 말했다. 백기완은 떠났으나 살구꽃은 올해도 피고 지고, 당신이 남긴 이야기꽃은 사람들 사이를 잇는다.
백기완과 신학철은 둘도 없는 동무였다.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천하의 이야기꾼에 버럭버럭 화도 잘 내던 백기완과 말솜씨가 뭉툭하고 어딘가 시골 아재의 구수함마저 풍기는 신학철이 오랜 친구가 된 까닭은 무엇일까. 백기완은 사람 구워삶는 재주가 있었다. 작은 걸 내어주고는 큰 걸 받아오곤 했다. 밥 한 끼 사주고 그림 한 점 받아오는 ‘봉이 백 선달’이었다. 애써 그린 그림을 선뜻(혹은 부지불식간에) 내어준 그림꾼들이 대체 몇이던가.
신학철은 백기완의 사정이 어려울 때마다 알아서 척척 그림을 가져다준 고마운 사람이었다. 보라고 가져온 게 아니라 팔아서 쓰라고 가져온 그림들이었다. 백기완은 그걸 팔아 새 일을 모색하곤 했다. ‘그림꾼이 이야기꾼을 먹여 살린’ 동화 같은 이야기라 차마 말할 수는 없겠으나, 아니라고도 할 수 없는 관계였다.
<부심이의 엄마생각> 연작 중 어떤 그림은 백기완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이 그림만큼은 차마 팔지 못하겠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이번에 공개하는 ‘국수 먹는 어머니’가 그것이다. 2012년 11월부터 40회에 걸쳐 경향신문에 <하얀 종이배>를 연재할 때는 빠짐없이 신학철이 삽화를 그렸다. <하얀 종이배>는 38선을 깨부순 가난하고 배운 것 없는 민중의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백기완은 “66년 동안 가슴 속에 묻어둔 이야기, 등에 짊어져 있던 무거운 짐을 이제야 풀어 놓는다”고 말했다. 신학철은 “삽화를 그려본 경험이 거의 없었지만” 함께 하자며 백기완이 내민 손을 뿌리칠 수 없었다.
둘은 주고받는 사이였다. 백기완이 들려준 이야기를 그냥 흘려들을 수 없어 신학철이 붓을 들 때가 있었고, 신학철의 그림에 마냥 눈감을 수 없어 백기완이 펜을 들 때가 있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우정이 오가며, 다른 곳에는 없는 소중한 작품들이 통일문제연구소에 차곡차곡 쌓였다.
눈 밝은 이라면 신학철의 대표작 속에서 백기완의 얼굴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260x130cm에 이르는 대작 <한국근대사-금강>(1996)은 신동엽(1930-1969)의 서사시 <금강>을 시각화한 작품이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을 시작으로 1919년 3.1만세운동과 1960년 4.19혁명으로 이어지는 고난과 투쟁의 민중사를 무려 4800여 행의 시로 옮긴 <금강>을 그림으로 번역했다. 마치 4800명처럼 보이는 수많은 얼굴들 사이로 “구속 전두환”이라 적힌 어깨띠를 두른 백기완이 보인다.
무려 20m에 달하는 초대형 작품 <한국현대사-갑돌이와 갑순이>(2002)에도 백기완이 있다. 최루탄이 난무하고 진압경찰이 밀고 들어오는 와중에 문규현 신부가 보이고, 계훈제 선생이 보이고, 검은 두루마기를 걸친 백기완이 보인다. 치열했던 한국현대사가 20미터 파노라마 속에 치밀하고 망연자실하게 펼쳐져 있다. 그림꾼 신학철에게 백기완은 다정한 동무이자, 근현대사를 온몸으로 관통한 역사 그 자체였던 것이다.
둘은 데모 동지가 됐다. 용산참사와 세월호참사 진상규명, 해고노동자 복직투쟁과 고공농성 현장 등 눈물겨운 몸부림의 현장으로 성큼 달려갔다. 2016년 겨울 박근혜 국정농단 국면에서 백기완은 여든다섯 살 늙은 몸을 이끌고 한 번도 빠짐없이 탄핵집회에 참석했다. 그때 신학철은 ‘백기완 부축 담당’을 자청했다. “이래봬도 내가 백 선생님을 제일 잘 부축하잖아. 그냥 나한테 맡겨둬.”
2021년 백기완이 떠날 때 영정그림으로 배웅하고, 부활도로 살아 돌아오기를 웅변한 이도 신학철이었다. 백기완을 그리워한 나머지 백기완의 어릴 적 친구 ‘방배추’를 형님처럼 모시고, 얼굴을 그려 선물했다.
요즘도 신학철은 “백 선생님이라면 기꺼이 찾아갔을 곳”으로 자주 발걸음 한다. 2024년 겨울 윤석열 비상계엄 국면에서 신학철은 백기완이 그토록 좋아했던 장산곶매를 깃발에 그려넣고 늙은 친구들과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탄핵집회에 참가했다.
누가 누구를 먼저 불렀을까. 누가 먼저가 중요한가.
백기완이 신학철을 불렀다, 신학철이 백기완을 부르고 있다.
_ 노순택_ 2025년 1월
<주요 전시작품>
- <부심이의 엄마생각> 연작 30점, 캔버스에 유채, 크기 다양, 1998-2006
- <하얀 종이배> 연작 40점, 종이에 먹, 21x30cm, 2012-2013
- <부활도 - 산 자여 따르라>, 캔버스에 유채, 116x91cm, 2020
- <장산곶매>, 종이에 먹, 25x35cm, 2024
- <민중후보 백기완 초상화>, 캔버스에 유채, 120x100cm, 2003
- <백산 일어서다>, 캔버스에 유채, 130x160cm, 2020
- <새뚝이 주먹>, 나무판 위에 유채, 39x29cm, 2003
- <달이 떴구나>, 나무판 위에 유채, 41x60cm, 2018
- <갑돌이> 한국현대사 연작, 캔버스에 유채, 116x90cm, 1991
- <울고넘는 박달재 - 노래인생이야기>, 캔버스에 유채, 53x73cm, 2009
- <백두산 호랑이>, 콜라쥬, 45x62cm, 2024
- <하늘을 우러러 – 방배추 형님> , 캔버스에 유채, 45x53cm,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