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기완마당집

1967년 백범사상연구소,
1984년 통일문제연구소,
2024년 백기완마당집으로


어둠의 계절, 1967년이었습니다. 통일의 ‘통’자도 입 밖에 내기 힘든 공기 속에서 백기완 선생님은 백범 김구 선생의 이름을 빌려 ‘백범사상연구소’를 열었습니다. 분단독재 유신체제와 맞서 싸울 둥지를 튼 것입니다. 돌아온 건 감시와 투옥, 강제 폐쇄, 고문과 강탈이었습니다. 간판을 뺏기지 않으려 등에 매고 다닐 지경이었습니다.

박정희 정권의 몰락 뒤 들어선 전두환 신군부의 탄압은 더 악랄했습니다. 보안사 지하실에 끌려가 고문받고 나온 백 선생님의 몸무게는 80kg에서 38kg으로 줄었습니다. 허나 무릎 꿇지 않았습니다.

1984년, 백범사상연구소를 ‘통일문제연구소’로 바꿔 이름 짓습니다. 변변한 사무실도 없이, 살림집에 종이 간판을 달았습니다. 중앙정보부에 빼앗기고 찢기고 불태워지기를 반복했지만, 굴하지 않고 다시 달았습니다.

1988년, ‘통일마당집 한 돌 쌓기’ 운동을 벌입니다. 한 푼 두 푼 모은 당신의 강사료를 먼저 내놓았습니다. 1948년 백범 김구 선생께 받은 소중한 붓글씨 2점도 미련 없이 팔았습니다. 그림꾼들은 그림을 내놓았고, 노동자 민중들은 500원씩을 모았습니다. 1990년, 명륜동 한 귀퉁이 오래된 살림집으로 ‘통일문제연구소’를 옮깁니다. 우연일까요 필연일까요. 1967년, 백범사상연구소를 열었던 해에 지은 집이었습니다. 바로 이곳입니다.

민주화운동의 산실로 자리 잡은 이 집은 ‘수서비리 사건’을 규탄하던 농성장이었고, 문익환 계훈제 등 재야 민주인사들의 시국회의와 선언의 역사현장이었습니다. 고통받는 노동자 민중들이 아픔을 토로하고, 투쟁을 다짐하는 사랑방이었습니다. 글꾼과 춤꾼, 그림꾼, 술꾼들이 문턱 닳도록 오가는 광대들의 마당이었습니다. 담벼락 ‘벽시’엔 부패 권력을 향한 질타와 노동과 통일과 삶에 대한 사랑이 담겼습니다. 그러니 권력자에겐 ‘눈엣가시들의 집합소’가 아니었을까요.

2021년, 백기완 선생님이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여든아홉 살 몸은 떠났으나, 말과 실천은 여기 남았습니다. 다시금 ‘한 돌 쌓기’를 하는 마음으로 3년의 모금과 모색 끝에 2024년 오월, 이 집을 다시 열었습니다. 백기완마당집입니다.

우리는 다시 묻습니다. 백기완이 깨부수려던 어둠의 계절은 끝났는가. 억울한 죽음은 이제 없는가. 불의와 싸우는 일은 부질없는가. 백기완마당집은 그런 질문이 모이는 집이 되기를 꿈꿉니다.

2024. 5.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