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기완

그 이름 하나가 한 시대의 희망이 되고, 깃발이 되고, 강령이자 철학이었으며 변혁운동론이었다. 박정희와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지던 군부 독재정권이 투옥과 고문, 가택연금으로 끊임없이 탄압했지만 ‘딱 한발띠기에 목숨을 건’ 그를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 산들바람처럼 속삭이다가 천둥처럼 내달리고, 폭포처럼 내리꽂았다가 곧 이심이처럼 솟구치던 그의 간절한 비나리와 몸부림을 따라 한국 현대 민주주의 역사의 한 장이 펼쳐졌다.

사람들은 그를 ‘영원한 민중후보’로 불렀다. 1987년 6월 항쟁 뒤 ‘가자! 백기완과 함께 민중의 시대로’라는 부름에 1987년과 1992년 노동자 민중들의 대통령 후보로 나서주었다. “이웃들이 다 어렵게 사는데 제 배지만 부르고 제 등만 따시고자 하면, 키가 안 커!” “땅에 떨어진 엿은 먹는 게 아니다, 뱉어!” 어머니의 가르침을 가슴에 새기며 평생 가난한 자, 빼앗긴 자, 저항하는 자들이 기대고 안길 한국 재야의 큰 산이 되어주었다.

사람들은 그를 시인, 저술가를 넘어 ‘민중문화재 1호’라고도 불렀다. 장산곶매, 이심이, 꼴굿떼, 새뚝이, 쇠뿔이, 곧은목지 등 우리 민중문화와 민중해방의 정서가 아로새겨진 이야기를 캐고 전하는 시대의 이야기꾼이었으며 달동네, 새내기, 모꼬지, 동아리 등 아름다운 우리말을 지키고 살려 쓴 민족문화 민중문화의 보고였다. 나아가 “혁명이 늪에 빠지면 예술이 앞장서자”라며 민중미학을 펼친 선구자였다.

한살매 한마음 한뜻으로 올곧게 살고자 했던 그는 남과 북으로 갈라져 살아야 했던 어머니와 누이를 평생 그리워하던 통일꾼이었으며, 돈이 큰소리치는 세상이 아니라 일하는 이가 주인 되는 세상, 인간해방 노동해방을 꿈꾸던 혁명가였다. “뼈다귀만 남아서 웃도리를 아홉 개를 껴입어야 그나마 추위를 견딜 수 있던 날”까지 항쟁의 거리와 광장을 지킨 ‘백발의 투사’였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그의 맹세와 노래가 있어 행복했던 이들이 모여 이 마당집을 지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