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

<매일노동뉴스> 기록물은 기본권, 백기완 아카이브가 중요한 이유

 [백기완노나메기재단 신학철 이사장·최갑수 공동후원회장]
“온몸으로 한국현대사 끌어안은 백기완, 그를 기록해 달라”

▲ 정기훈 기자

“백기완이 깨부수려는 어둠의 계절은 끝났는가, 억울한 죽음은 이제 없는가, 불의와 싸우는 일은 부질없는가, 백기완마당집은 그런 질문이 모이는 집이길 꿈꾼다.”

그가 없는 세상, 어둠이 다시 찾아들었다. 노동개혁이라는 이름으로 노동자는 기득권이 되고 노조는 혐오의 대상이 됐다. 노동약자라고 일컫는 비정규·특수고용직·플랫폼 노동자는 노동자성을 부정당하고 그들의 권리를 담은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 2·3조 개정안(노란봉투법)은 대통령에 의해 거부당했다.

그가 있었더라면 뭐라고 말했을까. “이거 봐~ 윤석열이!” 하며 백발을 휘날리며 쩌렁쩌렁 목소리로 불호령을 내리지 않았을까. 지난 1일 ‘백기완마당집’이 공식적으로 문을 열었다. 고 백기완 선생이 마지막까지 머물렀던 서울 종로구 명륜동 통일문제연구소 건물을 전시관과 회의실 등으로 꾸민 기념공간으로 재탄생시켰다.

백기완마당집은 그냥 기념관이 아니다. 1967년 백범사상연구소에서 시작해 1984년 통일문제연구소로 전환, 1988년 통일마당집 한돌 쌓기 운동을 거쳐 1990년 명륜동 살림집을 사들여 통일문제연구소를 이전했다. 2021년 백기완 선생이 별세하고 3년 만에 백기완마당집을 완공했다. ‘너도 일하고 나도 일하고 그래서 너도 잘살고 나도 잘살되 올바로 잘사는 세상’이라는 노나메기 사상의 집합체다. 여기까지 수많은 노동자·민중이 함께했다.

평범한 화가가 민중미술가로, 백기완을 만나다

<매일노동뉴스>가 21일 오전 서울 종로구 백기완마당집에서 신학철(81) 백기완노나메기재단 이사장과 최갑수(70) 재단 공동후원회장을 만났다.

신 이사장은 우리나라 민중미술을 대표하는 화가다. 홍익대 미대(서양화과)를 졸업한 뒤 중·고교 교사로 지냈다. 1980년대 들어 <한국근대사> 시리즈와 1990년 <한국현대사> 시리즈를 발표했다. 1987년 2회 통일미술전에 출품한 <모내기>가 국가보안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구속됐다가, 징역 10월에 선고유예를 받아 3개월 만에 보석으로 나왔다.

<모내기>는 1989년 정부에 몰수돼 서울중앙지검 압수물 보관소에 있다가 29년 만인 2018년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옮겨졌다. 작품은 오랫동안 접혀 있어 훼손된 상태였다. 작가는 작품을 돌려받지 못했고, 전시도 불가능한 상황이다.

최갑수 공동후원회장은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를 역임하다 2019년 정년퇴직을 하고 현재 서울대 명예교수를 지내고 있다. 프랑스 혁명사를 전공했다. 1999년 민주평등사회를 위한 전국 교수연구자협의회(민교협) 상임의장, 2000년 교수노조 준비위원장을 지냈다.

이들은 어떻게 해서 백기완 선생과 인연을 맺고, 그의 사후 재단 이사장과 공동후원회장을 맡게 됐을까. 백기완마당집 개관을 계기로 이들이 뭉쳤다.

- 백기완 선생과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됐는지 궁금하다.

신학철 : 백 선생 이름은 80년대 와서 들었다. 그 전엔 이쪽(민중미술) 그림을 안 그렸다. 홍익대는 그전에나 현재도 정치나 현실, 이념이나 메시지를 담은 그림은 그림이 아니라는 풍조를 가지고 있다. 그림에서 모든 걸 빼 버렸다. 저도 그렇게 했다.

그런데 그림을 그리다 보니 이야기쪽으로 가더라. 처음에 ‘하와이무궁화’ 화분을 사서 기르다가 죽어서 버리려고 뿌리를 꺼냈는데, 화분 모양 그대로 뿌리가 있었다. 이야기를 하더라, 그것이. 화분의 조건에 따라 그대로 모양을 갖더라. 이것은 인간의 조건이다, 이것을 어떻게 나타낼 것인가 생각하다가 캔버스에 뿌리를 그대로 실로 떠서 묶어놨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신 이사장은 “사물이 우리와 만나게 되면 우리에게 무엇을 전달한다”고 했다. 그는 나무줄기나 잎눈을 캔버스에 꿰매고, 70년대 말로 오면서는 인형과 연탄집게·전구·전선을 연결해서 작품을 만들고, 여성잡지 광고사진을 이용해 콜라주 작품을 만들었다. 그 작품들에선 생명의 느낌, 지구 문명의 그늘, 현대 물질만증주의 같은 이야기가 엮어졌다.

“그러다가 우리나라 역사 사진을 보니까 막 눈물이 났다. 신미양요 때 사진을 보며 안쓰럽고 불쌍하고 애처롭고, 그 안에 한국근대사가 다 있었다. 6·25 참상 사진은 제일 큰 충격이었다. 이 근처 아르코미술관 자료실에서는 1923년 관동대지진 사진을 찾았는데 진짜 미치겠더라. 그때 충격이 너무 컸다. 제대로 그림을 못 그렸다. 지난해 100주년을 맞아서야 그렸다.” 

▲ 신학철 백기완노나메기재단 이사장. <정기훈 기자>
▲ 신학철 백기완노나메기재단 이사장. <정기훈 기자>

통일 이야기 담은 <모내기>로 국보법 위반 구속

그렇게 그의 작품은 <한국근대사>와 <한국현대사> 연작으로 이어졌고 마침내 <모내기>로 국보법 위반으로 구속수감까지 이어졌다.

“<모내기>를 출품했을 때 백 선생께서 좋다고 했다고 전해 들었다. 백 선생은 한국민족미술인협회(민미협)에 자주 오시고 강연도 하셨다. 제가 구속됐다가 나온 1989년 초봄 즈음에 백 선생께서 밥 먹자고 부르셨다. 그때 처음 만났다, 송추계곡에서. 저를 위로해 주셨다.”

최갑수 : 신 이사장님과 비슷한 시기였던 것 같다. 백 선생께서 80년대 말에 서울대 강연을 오셨는데 제가 교문까지 마중을 나갔다. 그때 저도 적극적인 사회활동을 하기 전이라서 백 선생님을 처음 봤다. 덥석 손잡고 모시고 들어왔다. 그게 첫 인연이었다. 2010년 노나메기재단 추진위원회나 ‘노래에 얽힌 백기완의 인생이야기’ 서울대 공연 등에서 만났다. 백 선생께서는 이애주 선생(당시 서울대 교수, 무용가)과도 가까웠다. 제가 이애주 선생과 인연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백 선생 이야기를 많이 하셨다.

또 다른 인연도 있었다고 했다. 90년대 백 선생 아들의 혼례잔치 때라고.

“백 선생께서 주례를 김진균 서울대 교수에게 부탁했다. 김 교수께서는 그날 저와 등산을 하는 날이었는데 일찍 내려와서 결혼식장에 함께 갔다. 혼주인 백 선생이 주례자인 김 교수에게 그렇게 수줍게 대하는 건 처음 봤다. 백 선생의 그런 면모는 처음 봤다.”

그때 곁에 있던 양기환 전 재단 대변인이 “김진균 교수는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 후원회장이었다”고 거들었다. 최 공동후원회장은 “김 교수께서 90년대 중반 일요일 저녁 지하 맥주집 같은 데서 후원금 전달을 여러 번 했다”고 전하기도 했다.

백기완이 사랑한 신학철의 그림, 힘의 원천
장기투쟁 노동자 투쟁기금 마련 위해 ‘아낌없이’

- 신 이사장의 그림이 백기완 선생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고 들었다. 통일문제연구소부터 백기완마당집까지, 그리고 1992년 대선에서도 그림을 팔아 백 선생 대선운동에 큰 힘이 됐다는데.

최갑수 : 1992년 대선 때 그림은 제가 할 말이 있다. 당시 나왔던 그림 중 하나를 제가 구입했다. <외딴집>이라는 작품이다. 전시회에 갔더니 그 그림이 눈에 띄더라. 그래서 딱 찍었지.

신학철 : 그거 우리 누나 집이다. 정태춘이 그걸 제일 멋있다고 했다.

- 또 어떤 작품들을 내놓았나.

신학철 : 1988년 통일마당집 한 돌 쌓기 기금 마련 전시회 때 내놓은 작품은 아직 안 나타났다. 부부가 일하고 있고 딸이 뒤돌아서서 먼 데를 바라보는 모습이다. 서울 가고 싶어서. <외딴집>과 같은 10호짜리 그림인데.

그때 양기환 대변인이 옆에서 “장기투쟁 사업장, 비정규 노동자 투쟁기금 마련을 위해서도 그림을 내놓으셨다”고 소개했다.

신학철 : 제 그림이 시립미술관에 많이 들어가 있고, 국립현대미술관에도 들어가 있다. 다 기금 마련 때 내준 것들이다. 어떻게 보면 내가 돈 한 푼 안 냈는데 작품들이 한데 모여 있어서 편하다. 민주노총과 전교조 출범할 때 그림을 내놓았고, 기륭전자와 콜트·콜텍 노동자 투쟁, 스크린쿼터 영화인 투쟁 등 투쟁기금 조성을 위해 작품을 내놓았다.

- 지금 백기완마당집에도 신 이사장의 그림이 남아 있다.

신학철 : 모두 3점이 있다. 백기완 선생 장례위원회를 꾸렸을 때 각자 역할을 하기로 했는데, 나는 그림을 그렸다. 그것이 <부활도>다. 백 선생 사진을 훑어 보니 가장 잘 드러나는 게 ‘임을 위한 행진곡’이어서, (노래 부르는) 그 모습을 중심에 둬야 할 것 같았다. 뒷배경에는 뭘 넣을까 생각하다가 설악산과 동해에서 해 뜨는 장면, 밝은 세상이 오는 모습을 담았다.

백기완마당집 1층에 재현한 백기완 선생 옛살라비(옛방)에 걸려 있는 <갑돌이> 시리즈 중 <엿장수>는 서정적인 면을 높이 샀다고 한다. 신 이사장이 “<엿장수>는 전태일재단 기금 마련 전시회에 백 선생께서 내놓으려고 했다던데”라고 하자 옆에 있던 채원희 재단 사무처장이 “아니다, 오해가 있다. 내놓는다는 게 아니라 빌려준다는 의미였다. 백 선생님은 끝까지 안 판다고 했다”고 바로잡기도 했다. 또 다른 서정적인 그림인 <달이 떴구나>도 백 선생께서 정서가 맞다고 좋아했다고 한다.

이뿐 아니다. 2005년 펴낸 백기완 선생의 자전적 회고록인 <부심이의 엄마생각> 표지와 연작그림을 모두 신 이사장이 그렸다고 한다. 모두 30점이다.

신 이사장은 “백 선생께서 표지 그려줘서 고맙다고 (아내가 입원한) 보라매병원까지 찾아왔다”며 “그때 제가 책을 보고는 연작그림으로 그려야겠다고 했지요. 내가 내 발등을 찍었지”라고 회상했다.

그림 30점은 2010년까지 간직하고 있다가 ‘노나메기 문화관’을 짓자고 두 사람이 의기투합해 내놓았고, 그것이 종잣돈이 돼 지금의 재단을 만드는 데 기증됐다고 한다.

신 이사장은 경향신문에 연재한 백기완 연재소설 <하얀 종이배> 삽화 40점도 그려줬다고 한다. 재단은 <하얀 종이배> 삽화 40점과 함께 <부심이의 엄마생각> 중 백 선생께서 팔지 않은 딱 한 점과 새로 그리는 3점, 마당집에 남은 3점, 동학 이야기를 담은 <백산 일어서다> 100호짜리 작품 등을 모아 내년 백기완 선생 4주기를 맞아 마당집 2층에서 신 이사장 개인전을 열 계획이다. 백 선생이 아끼던 소장작품을 공개한다는 의미가 있다는 설명이다. 

▲ 정기훈 기자
▲ 정기훈 기자

역사가, 백기완의 강렬한 매력에 이끌리다

- 재단 이사장과 공동후원회장을 맡은 계기가 궁금하다.

신학철 : 제 성격상 안 한다고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할 사람이 없다고 해서 맡았다. 가족적인 분위기일 줄 알았는데 나중에 발기인 명단을 보니 우리나라 사회운동하는 단체와 어른들이 다 있더라. 큰일 났다, 빼박이다 싶었다. 하하. 운영진과 이사진을 믿고 왔다.

최갑수 : 민교협과 교수노조를 하면서 백 선생을 길거리에서 뵐 때마다 인간적인 매력이 강렬했다. 제도권 고등교육을 받지 못했어도 온몸으로 한국 사회를 안고 변화를 이끌었다. 역사가 입장에서 참 대단하다고 싶었다. 한국현대사를 돌아볼 때 이분의 삶과 자료를 다 모아 (디지털 기록관인) 아카이브와도 연결할 수 있겠다 싶었다.

재단은 백기완 선생 별세 이후 3년 만에 백기완마당집을 열 수 있었다. 그 다음 과제는 아카이브라고 했다. 공동후원회장을 맡고 있는 최갑수 명예교수와 명진 스님이 지난해 노동자가 마당집과 아카이브에 관심을 갖기를 바라며 금속노조와 공공운수노조 중앙집행위원회 자리에 가서 직접 설명하고 십시일반 도움을 줄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 이 밖에도 금융노조, 공무원노조, 서울지하철노조, 민주노총 인천본부 등에 직접 발품을 팔았다.

백 선생은 IMF 외환위기 이후 비정규직이 양산하고 노동자의 삶이 위기에 처하면서 생애 마지막 20여년을 노동자와 함께했다. 그는 한진중공업·기륭전자·김용균 등 노동자의 곁에 있었고, 생애 끝자락 마지막으로 쓴 글씨도 ‘노동해방’ 네 글자였다. 

▲ 최갑수 백기완노나메기재단 공동후원회장. <정기훈 기자>
▲ 최갑수 백기완노나메기재단 공동후원회장. <정기훈 기자>

“기록물은 기본권, 백기완 아카이브가 중요한 이유”

- 아카이브가 왜 중요한가.

최갑수 : 백기완 선생의 힘은 자기 자신과 고향에 놓고 온 어머니와 누이들에 대한 그리움을 형상화하고 확장해 가면서 끊임없이 자기와 화해를 해 왔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 삶의 구조가 통일운동과 노동운동을 같이 이끌어가면서 우리 시대 현대사 흐름과 자기 이야기를 끌어갔다. 이를 엮으면 굉장히 훌륭한 평전이 될 것이다.

최 공동후원회장은 “기록물은 기본권”이라고도 했다. 1948년 12월 유엔총회에서 채택한 세계인권선언 19조에서는 “모든 사람은 의견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 이러한 권리는 간섭 없이 의견을 가질 권리와 국경에 관계없이 어떠한 매체를 통해서도 정보와 사상을 추구하고 얻으며 전달하는 자유를 포함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최 공동후원회장은 “기록물을 우리가 만들고 모든 세계 시민이 누려야 하는 기본권으로서 간주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백 선생은 운동권에서 보면 가장 힘 있게 싸워 오셨고 그래서 살아남으신 분이다. 승리자다. 그래서 아카이브가 굉장히 중요한 분이다”고 강조했다.

재단은 지난해 8월 ‘백기완 기록보존소’ 참여를 호소하면서 “선생은 광복과 분단으로부터 일련의 독재에 맞서 빈민, 통일, 문화, 예술, 민주, 민중, 노동해방운동을 온몸으로 받아 이끌고 자본주의를 넘어 노나메기 세상을 보듬은 한국 현대사의 증인”이라며 “그의 기록물은 한 개인의 삶의 수준을 넘어 한반도를 밑천 삼아 지구적인 전환을 꿈꾼 문명사의 차원에 값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참으로 ‘우리가 했던 일을 세계가 보게 하리라’”고 강조했다.

“우리가 했던 일을 세계가 보게 하리라”

현실은 녹록지 않다. 재단에 따르면 아카이빙을 하려면 박사급 연구원 2~3명이 필요하다고 한다. 백 선생의 모든 자료를 수집·정리·분류해서 디지털로 전환해야 거기로부터 평전·다큐가 나오고 공공적 자산으로 후대에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전태일재단이나 노무현재단에 비해 백기완노나메기재단은 회원수가 극히 적고, 관심도 부족하다고 안타까워했다. 백 선생께서 생애 마지막 함께했던 노동자와 민중이 직접 참여해 주길 바라는 마음도 간절해 보인다.

최갑수 : 아카이브 작업이 돈이 꽤 든다. 백 선생의 소중한 자산은 화석처럼 있는 게 아니다. 이 사람의 삶이 나이테처럼 기록돼 있다. 비주류 삶 중에 기록이 잘 돼 있다. 고향에 두고 온 어머니가 버팀목이 돼 주셨고, 꿈을 키워 온 것은 할머니로부터 들은 엄청난 이야기였다. 이 분의 글을 읽어 보면 자기 삶의 궤적이 달라지고, 좀 더 규모를 키워 형상화해 키우고, 그것을 내면화하면서 또 새로운 형태의 정반합이 나왔다. 나선형 같은 삶이다. 그런 삶의 반경이 커졌다. 그리고 결정적인 것은 묏비나리를 쓴 1980년 겨울 우뚝 섰다.

신학철 : 노나메기 사상은 성인의 반열에 올라가 있다고 생각한다. 최갑수 선생과 같은 이야기다. 서양교육 없이 이어진 그 자체가 민족정기다. 우리나라의 가운데 토막, 이게 정통이다. 독립운동하던 그 마음, 김구 백범사상으로 갔고, 거기서 통일문제로 왔고, 우리 현실이 더 중요하다고 했다. 그것이 노동자다. 우리 역사의 정통성은 서양에서 배운 사람들에게서 안 나온다. 종교와 무관한 현실적 입장에서 다시 한 단계 더 뛰어넘은 것이 노나메기 사상이다. 어떤 사상보다도 가장 현세적이고 투쟁적이고 혁명적이다.

최갑수 : 백 선생께서 남긴 자료를 아카이빙해서 정확한 연대로 해서 재구축하는 것이 중요하다.

백기완마당집 1층에서 2층으로 오르는 계단에는 1923년 암태도 농민운동, 1929년 원산 총파업 등 민중운동사를 백기완 선생 연보와 같이 연대별로 정리해 놓았다. 재단은 “노동자·민중의 시선으로 역사의 굽이굽이 근현대사를 정리한 곳은 여기밖에 없다”고 소개한다.

최갑수 : 프랑스 파리에 국립문서고가 있다. 그곳 별관에 보면 기록할 때 쓰는 보존상자가 어마어마하다. 전 세계 최고다. 우리도 백기완 선생의 모든 자료를 모아 분류하고 시대를 맞춰야 한다. 자료의 형태가 다양해 보존하는 방식은 따로 있지만 일단은 연대순으로 붙여서, 예컨대 누가 와서 87년 3월 뭐했나, (보존상자를) 딱 열어보면 종이로, 영상으로 딱 볼 수 있게 분류가 돼 있어야 한다. 누구든지 가서 볼 수 있게 온전하게 보존돼야 한다. 우리가 사회운동 일환으로 하는 것인 만큼 누구보다 노동운동에서 관심을 가져 줬으면 한다.

현재 재단은 지난 2년간 백기완 선생의 문서자료 목록화를 1단계로 끝낸 상태다. 하지만 사진이나 영상 등은 손도 못 대고 있다고 한다.

최 공동후원회장은 “백 선생의 아카이브를 구축해서 평전을 쓰고 그다음 대중화하고 그렇게 우리 모두의 공적인 것이 된다”며 “이것을 노동운동이 해야 사상의 진정성이나 운동의 순수성이 유지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노조에서 백 선생 아카이브 구축에 관심이 있다면 언제든지 달려가 설명회를 할 수 있다”면서 적극적인 관심을 호소했다. 

▲정기훈 기자
▲정기훈 기자

“백 선생 계실 때처럼 북적북적 마당집 됐으면”

백기완마당집은 화~금요일 평일에는 오후 1~5시, 토요일 오전 11시~오후 5시 개관한다. 월요일·일요일·공휴일엔 휴관한다. 5월1일 개관한 뒤 2주 동안 주중에는 하루 평균 15~20명, 주말에는 30명 정도 시민들이 꾸준히 찾아온다고 한다. 첫날에는 50명가량 찾았다고 한다. 인터뷰하던 이날은 문을 열기 전부터 관람하려고 시민들이 찾아오기도 했다. 재단은 백기완마당집 소개글에서 “백기완이 깨부수려는 어둠의 계절은 끝났는가, 억울한 죽음은 이제 없는가, 불의와 싸우는 일은 부질없는가, 백기완마당집은 그런 질문이 모이는 집이길 꿈꾼다”고 밝혔다.

- 백기완마당집이 3년간의 노력 끝에 완성됐다. 어떤 공간이 돼야 하는가.

신학철 : 백 선생과 함께 사회운동을 한 사람들이 여기 와서 백 선생 살아 있을 때처럼 북적북적하면 좋겠다. 여기에서 논의하고 한 생각을 모을 수 있는 장소가 됐으면 한다. 그것이 노나메기 세상을 위한 것이다. 아직은 노나메기 기념관으로서 많이 딸린다. 인력도 재원도 부족하다. 재원부터 마련해서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이 같이하고 다른 사람들이 와서 도와주는 상태가 아직은 못 되는 것 같다.

최갑수 : 지금 당장 가진 꿈은 여기 백 선생의 좋은 기록이 있으니까 이것을 보고 사람들이 느끼고 결국은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이 사람 일생을 현대사와 같이했는데 그걸 느낄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아카이브 구축과 평전을 쓰는 것이 중요하다. 노동현장에서 같이하면 좋겠다. 나도 함께하겠다.

사진=정기훈 기자

연윤정 기자 yjyon@labortoday.co.kr
2024.05.27 07:30